코닥의 상품은 사진이나 필름이 아닌 기억이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결정하죠. 우리가 브랜딩과 마케팅이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고객에게 상품을 구별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일에 관한 일입니다.
자동차는 안전과 효율과 고성능과 편리함 등 그것이 작동하는 메카니즘에 있어서 우선시 되어야 하는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디자인의 이유 때문에 특정 자동차를 선택하곤 합니다. 똑같은 빈을 사용하는 커피지만 어떤 라벨이 붙은 커피냐에 따라 선호도는 완전히 달라지죠. 비단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상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탁 세제에는 원래 파란색의 알갱이가 필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파란 표백 알갱이를 통해 표백 기능의 신뢰를 주려고 했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제품의 가치를 눈에 보이는 근거로 제시하는 일이 어쩌면 브랜딩과 마케팅이 해 온 주된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필름을 팔던 시절, 독일의 사진 매거진에 실린 코닥의 광고>
하지만 반대로, 작금의 세계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을 무형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일입니다. 필름이 아직 존재하던 시절, 코닥은 감광능력이나 발색력을 팔지 않았습니다. 추억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기억’을 팔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제품 개발의 많은 부분은 결국 제품의 가치를 실체가 있는 것으로,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꾸는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변별력이라는 것은요? 백만원 짜리 스피커와 천오백 만원 짜리 스피커의 가격 차이를 여러분은 쉽게 설명할 수 있나요?
그 단초 중 하나는 우리가 ‘서비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형의 제품이라고 칭했지요. 최고급 호텔 바의 바텐더가 행하는 미세하고도 유려한 배려의 제스쳐를 경험해보면 처음엔 그것이 굉장히 개인적인 능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룸으로 가는 복도에서 마주친 메이드의 여유로운 미소와 룸에 있던 나의 물건을 마치 오랫동안 자신이 소중히 사용해온 물건처럼 재정리되어 있는 경험을 해보면 그것이 개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약속된 시스템임을 깨닫게 됩니다. 잘 정리된 욕실과 온화한 미소로 호텔은 고객과의 약속을 유형화하는 동시에 무형의 가치를 통해 고객으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약속 받습니다. 세상 무서운 서비스란, 그 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되기까지는 그 서비스를 인식할 수도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1592년 수도원으로 지어진 페루 쿠스코의 Monasterio Hotel. 고급 호텔의 휴지 끝이 화살촉처럼 단정하게 접혀 있는 건 '이 방은 당신을 위해 특별히 청소한 것입니다'라는 조용하고 확실한 메시지>
서비스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균일하고 약속된 수준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고 또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상품에 그 무형의 가치, 예컨대 서비스의 개념을 대입해볼까요?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판매)을 하고 나서 마케팅은 끝이 나는 것이라면 그 호텔(제품)은 아마도 문을 닫게 되겠지요. 가치의 차이를 만드는 것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결이 납니다. 팔기 전에도, 파는 순간에도, 그리고 팔고 나서도 마찬가집니다.
잠재 고객의 위상에 대한 기대와 욕망을 부추기는 모든 일들은 사실 마케팅이 해왔던 핵심적인 일이었습니다만 지금 마케팅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즉, 팔고 나면 그때부터 세계는 시작됩니다.
팔고 나면 그때부터 세계는 시작된다
팔기 전의 일들 즉 팔기 위한 행위를 우리는 마케팅이라고 흔히 알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시장에서 잠재 고객을 끌어오고 용케 판매 전환까지 이루어냈습니다. 매출이 벌어졌습니다. 마케팅이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자, 그 다음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요?
물건이 당신에게 배송되고 있습니다
쿠팡이 처음 선보인 택배 직원의 메시지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로켓배송이라는 획기적인 물류시스템 보다도 소비자로 하여금 쿠팡으로의 전환에 더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릅니다. 택배를 받아보는 낙으로 산다는 수많은 소시민들에게 함부로 다루어진 택배 상자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꺼내는 ‘의식’의 감흥은 상쇄되기 마련입니다. 구매자의 소중한 택배를 소중하게 배송하고 진심 어린 메시지로 택배의 안녕을 실시간 사진으로 받아보는 행위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택배 배달원을 타자에서, 구매 행위의 바운더리로 개입시키는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구매 경험이 훼손되지 않는 이와 같은 메시지 전송 시스템은 이제 많은 물류/유통 산업에서 일반화된 ‘양식’이 되었습니다.
<저 가지런한 손 안내 사진은 택배사로부터 그 전까지 받아본 적이 없었더랬다. 출처: theqoo.net>
경건한 마음으로 물건을 개봉합니다
애플은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에도 제품 디자인에 버금가는 자원을 쏟은 것으로 유명하죠. 그냥 쉽게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열어볼 때의 첫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받아볼 때까지 제품의 가치에 대해 기대와 회의를 동시에 하게 됩니다. 물건을 처음 개봉할 때, 패키지를 통해 이미 제품의 신뢰와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대단한 디자인, 아니 마케팅의 획입니다. 똑똑한 엔지니어들이 제품의 퍼포먼스를 더 없이 잘 만들어서 그저 골판지 박스에 쑤셔 넣어 보낸 제품이 아니었죠. 이후 이와 유사한 IT 제품의 패키지들은 이제 패키지 디자인 자체가 제품의 수준과 가치를 반증하게 되었습니다.
<2001년 iPod 패키징. 디자이너 Andy Dreyfus 출처: celebratedesign.org>
개인적으로는 물건의 포장 박스를 소중히 뜯는 취향은 없습니다. 오히려 패키지가 과하면 환경 오염이 우려되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저 같은 사람을 핵심 타겟으로 판매하는 브랜드의 패키지는 말 그대로 친환경적인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지요.
늘 받아보던 마켓컬리 새벽 배송의 패키지가 어느 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에코워터팩, 종이 박스, 재활용 종이 보충재, 뿐만 아니라 포장재까지 다시 회수해가는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환경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변화일 수도 있지만 그 포장 박스를 열어보면서 마켓컬리가 이 배송 패키징 전환을 위해서 투자했을 돈을 생각해보니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만큼의 가치를 마켓컬리가 발견했다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죠.
이후, 마켓컬리 박스는 현관문 앞 다른 많은 택배 박스들과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배달 온 음식에 식당 사장님의 편지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배달 음식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그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사라남고자 배달 음식점들은 고객의 만족(을 통한 좋은 리뷰)을 위해 흔하디 흔한 치킨에도 사장님의 자필 편지가 담겨 있고는 합니다.
소비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물건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다이소에서 산 플라스틱 박스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겠지요(그렇다고 그걸 신뢰할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치킨 한 마리도 누가 정성스럽게 튀겼는지를 상세히 받아보는 세상입니다.
퍼블리의 한 해의 마지막 레터에는 박소령 대표님이 직접 메일의 본문을 씁니다. 그야말로 레터지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메일을 보내면서 지난 해의 리포트나 새해의 전망 또는 비즈니스의 비전을 쓸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 메일에는 연말 휴가는 어디를 다녀왔고 가서 무슨 생각이 들었고 이런 걸 좀 더 잘해보고 싶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편지가 담겨 있습니다. 2020 새해 트랜드 따위 거창하게 읇으며 인사이트를 주거나 글을 잘 쓰는 에디터의 큐레이션 컨텐츠도 아니고 바로 CEO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독자에게 알려주었지요.
<2019년 12월 말, 퍼블리의 뉴스레터 출처: 퍼블리 뉴스레터>
프라이탁의 최고의 홍보는 설립자인 프라이탁 형제가 단지 전세계의 프라이탁 매장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제품에 대한 중요한 무형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분명 CEO도 제품의 요소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 박소령 대표님의 연말 마지막 레터가 퍼블리를 재구독 하는데 큰 몫을 했습니다.
물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카카오뱅크의 해외송금 서비스를 처음 사용하다가 기존 은행과 달리 너무나 생략되어 있는 해외 은행 계좌와 코드값 등의 기입 과정은 심지어 프로세스에서 누락된 게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결국 기존 은행들의 지난한 해외송금 과정에 익숙해 있던 저는 송금 과정에서 에러가 발생했고 관련해서 ARS로 연락했습니다. 전화 연결음을 들으며 또 관련 부서로 몇 번이나 숫자 키패드를 눌러야하나 한숨을 쉬는 중, 불현듯 상담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상담 주제를 카테고리화 하면서 진을 빼지 않더군요. 물론 기존 금융권 보다 고객이 적어 초반에 수행할 수 있는 서비스였을 수도 있겠지만 카카오뱅크는 당시 소위 인터넷은행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고객의 문의를 받을 확률이 높았으리라 예상합니다. 여튼, 문제의 원인은 친절하게 규명되었고 설명 말미에 지금 설명을 복기할 수 있도록 방금 고객님의 카톡으로 문자메시지도 넣어드렸다고 합니다. -까똑.
그 상담사는 카카오뱅크의 아주 특별한 상담사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최고급 호텔 바에서 경험할 수 있는 완벽한 무형의 가치와도 같았습니다. ‘다른 은행 보다 좀 더 친절해’가 아니라 다른 시스템이었고 다른 친절함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서비스를 비개인화 할 정도로 체계화 하는 것이지요.
제품의 수명 기간이 끝날 때쯤 쿠폰은 날아옵니다
얼마 전부터 샐러드를 정기배송 받아 회사에서 점심으로 먹고 있습니다. 샐러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해당 업체는 나름 정교한 CRM 자동화를 통해서 정기 배송 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다음 구매를 종용하는 쿠폰도 보내주고, 정기배송의 말미를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다만, 해당 쿠폰이 날아온 시점은 정기배송의 다양한 샐러드를 아직 1/3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점이었는데 쿠폰의 만료 기한이 수일 내라서 판매자의 조급함이 아쉬웠습니다. 정기배송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는 반대로 너무 늦게, 마지막 배송이 되는 날 수신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정기 배송을 주문하기까지 공백 기간이 생기게 되고 모처럼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해보려는 의지가 좌절되기 쉬울 뿐더러 이탈도 수월해지겠죠.
자동 CRM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정크에 가까운 메시지들을 많이 받아봅니다. 은행의 장기간 우수 거래 고객으로 선정되어 상품을 안내 받는 것처럼 공허하기 그지 없지요. 고객과의 정교한 관계 세팅은 배려와 상상력에서 기인합니다. 내가 만드는 제품이 누구에게 왜 얼만큼 필요한지를 골똘히 고민하지 않은 판매자라면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자신의 고객의 마음은 모를테죠.
on-line. 네, 계속 듣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라면 나이키의 NRC(Nike Run Club) 어플을 다들 사용해보셨겠지요. 저는 오랜 기간 동안 달리기를 해오면서 북미에서 가장 많은 러너들이 사용했던 Map My Run 어플을 사용해왔습니다. 지금 이 어플은 언더아머의 소유가 되었고요.
NRC가 처음 나왔을 때 사용해본 결과 MMR 보다 자동 일시정지와 운동재개의 센서가 더 정교하게 작동했습니다. 저에겐 단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NRC로 갈아 탈 이유가 됐지만 MMR에 지난 몇 년간 저장된 달리기 데이터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NRC로 과감히 이주했습니다. MMR이 언더아머의 소유가 되면서 어플에 담긴 콘텐츠에 달리기에 대한 전문성이 점점 떨어졌는데 반해 나이키는 콘텐츠가 더 좋아졌습니다. 언더아머는 나이키에 대항하기 위해서 MMR을 인수했을 뿐 워낙에 러닝 분야의 전문 브랜드는 아니었던 거지요.
< Nike Run Club 앱. 출처 : 나이키닷컴>
저는 달리기는 고독하게 해야한다는 주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NRC 사용자 수가 MMR을 뛰어넘은 이유는 나이키는 달리기를 게임으로 잘 승화시켰을 뿐더러, 무엇보다 NRC 어플을 통해 달리기 커뮤니티를 장려하고 실제로도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그것(달리기)을 계속 하고 싶은 즐거운 행위로 바꾸는 일이었던 것이죠.
나이키는 커뮤니티를 적극 부추겼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행위를 지속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응원했고, 결국 나이키 러닝화가 나를 더 나은 삶으로 데려가는 매개체라는 ‘증명’을 러너들로 하여금 몸소 확인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죠. 구매자는 계약 관계의 사람입니다. 브랜드와 단단히 계약된 채로 살아가는 약혼자지요. 당신이 판 제품으로 어떤 삶을 누리게 만들건지 설계하는 단계까지 간다면 궁극의 로열 오디언스가 당신의 브랜드를 신앙할 것입니다.
당신의 제품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더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더 어려운 일은 판매 이후의 일입니다. 잘 만든 제품을 팔고, 그것을 잘 써주기만을 기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무형 자산인 고객과의 관계를 단지 도박에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판매 이후의 일들은 판매자에게 잘 보이지 않지요. 간과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는 그 경험을 통해 또 다른 결정을 낳게 됩니다. 로열 오디언스가 될지 부정 소비자가 될지. 그리고 그 둘의 차이는 우리가 기존의 마케팅이라는 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일이 될 겁니다.
결국 소비자의 경험을 집요하게 고려하지 못한 판매자는 이 일련의 일들을 해낼래야 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수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도, 고객 관리를 체계화 해야 한다 머리로 깨달아도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과까지 도출하기는 어렵지요.
무언가를 시장에 낸다면 ‘누군가’의 문제를 ‘분명히 해결’하겠다는 각오와 의지가 있기를 간곡히 바래 봅니다. 그것이 없이는 판매 이후 벌어지는 ‘세계’에 판매자가 영향력을 미치는 일은 앞으로 더욱 희박할 겁니다.
김해경
CMO
hara@stone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