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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다니던 회사는 광고마케팅 대행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페이스북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콘텐츠 기획을 하면서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를 운영하였습니다. 동시에 MD가 되어 클라이언트 MD와 협업하여 상품 기획을 했고, 다음쇼핑하우라는 플랫폼에 입점하여 상품을 판매하고 판매 수치 데이터 분석을 하였습니다. 또한 웹 이벤트 기획, 온라인 세미나 진행, 오프라인 행사 기획 등을 하였는데요."
물론 이렇게 많이 했다는 것을 잘난척하듯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내 왼쪽 커다란 LG 모니터에 이미 내가 했던 것들을 충분히 당근마켓 5명의 면접관은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느 정도 잡다한 일들을 잡다한 방법으로 했다는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고, 저 말은 다음 나올 대사를 위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쓴 것이다.
"이를 통해 많은 업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업무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업무를 어떻게 분배해야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제가 가진 가치관의 효율성은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전 회사에서 기술은 배웠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에 대해서는 고민할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소통할 수 있는, 사람 간의 따뜻한 교류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통해 따뜻한 교류가 있기를 희망한다'는 당근마켓팀 홈페이지의 비전을 슬쩍 인용하여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 지었다.
이 답변은 5명의 면접관 중 1명인 게리(는 당근마켓 CO-CEO이다)가 ‘이전 직장을 퇴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이다. 전 직장을 상기하며 얼굴이 빨개지지 않기를 속으로 바랐다. 다행히 조리 있고 깊은 고민을 한듯한 제스처와 함께 말을 마쳤다.
'거지 같은 그 회사는 야근은 기본이고요. 퇴근은 항상 택시로 해요. 지하철이 끊겨서죠. 그리고 모든 대행사가 그렇듯.. 아시잖아요? 국가에서 지정한 근로기준법에 의거한 공식 업무시간에는 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저러한 잡다한 누군가의 일을 하다가 그 시간이 지나서야 제 일을 하기 시작하죠. 클라이언트는 또 어떻고요. 꼭 5시 30분쯤에 수정 요청을 하더라니깐 글쎄. 아 뭐 이건 괜찮아요. 어차피 6시에 퇴근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다른 대행사 다니는 제 친구가 자기 회사 클라이언트는 꼭 5시 48분쯤에 일을 준다며 그 일을 마치 훈장마냥 가슴팍에 턱-하고 걸치곤 슬퍼해야 할 상황에 희미한 미소를 띠더라고요. 그게 잠깐 생각이나 흉내내봤어요. <누가누가 더 힘드나 자랑해보자!> 시간에 그 녀석이 항상 쓰는 비장의 카드거든요. 웃기지 않아요? 그걸 비장의 카드라고 내밀고 앉았다니. 그렇다면 전 타로사가 되어 78장의 카드를 쭉 보여준 다음, "시간 없으니 여기서 3개만 골라!"라고 말한 후에 하나씩 하나씩 회사의 거지 같은 부분을 보여줬을 걸요. 물론 그건 제 얼굴의 침 뱉기니까 하진 않았어요.’
차마 이런 말은 할 수 없었으리라. 여긴 내 다음 커리어를 위한 최종 관문이며, 오늘의 내 모습이 그들이 앞으로 함께할 동료를 선택하는 데 모든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전 직장을 예쁘게 포장해야만 했다. 앞서 (1장에서)말한 그 ‘똥’을 포장한들 냄새가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찌르지 않게 하기 위해 포장 패키지를 멀리-멀리에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게리가 말했다.
"제가 혹시라도 당근마켓에 입사하게 된다면 가져야 할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난 준비한 멘트를 또박또박 읊었다.
“음, 이미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토대로 봤을 때 한재원님은 충분한 역량을 가졌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게리의 차분한 어조는 라디오 <푸른 밤>에 오디오자키 성시경의 ‘잘 자요~’를 방불케 하는 달콤함이었다. 나는 곧장 손을 번쩍 들었다. 마지막 나의 비장의 카드를 꺼낼 신호인 것이다. 이 카드만큼은 78장의 거지 같은 카드가 아닌 당근마켓이라는 서비스를 당일 체험하고 느꼈던 따뜻함을 보여줄 새로운 1개의 카드이다.
"저, 마지막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손을 황급히 내리고 의자 옆에 놓인 가방을 올려 들었다. 10개의 눈은 일제히 내 가방으로 향했다. 난 조심스레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봉투 겉면에는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라고 검은 펜으로 투박하게 쓰인 문구가 박혀있었다.
"제가 사실 오늘 면접 오기 전에 당근마켓 거래를 하고 왔는데요. 물건을 팔려고 거래자를 만났는데 그분께서 돈봉투와 함께 캐러멜 주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라는 글도 써주시고요. 직접 이 서비스를 써보고 따뜻한 경험을 해서 너무나 감동받았어요. 제가 받은 이 따뜻함을 당근마켓팀의 구성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날만큼은 난 스티브 잡스였고 ‘한재원’이라는 제품 시연 설명회에 초청된(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나를 설명하러 간 것이지만) 5명의 고객은 그 시연이 성공적이라 생각하며 보았을 게다. 그리고 스스로도 성공적이었다 자부하며 따뜻함이 가득한 사무실을 등 뒤로한 채 집으로 향했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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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당근마켓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군으로 불리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