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온천 여행
소슬하게 짙어가는 계절, 긴장한 몸과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줄 여행이 절실해진다. 전 세계 곳곳에서 지구가 내주는 치유의 샘, 웅장하고 아름다운 온천의 품에 안기는 여정을 고르고 골랐다.
고대 유적과 함께하는 온천, 헝가리 세체니
헝가리는 ‘온천의 땅’이다. 전국 곳곳에 450여 곳, 수도 부다페스트에만 120여 곳의 온천장이 있다. 부다페스트를 관통하는 다뉴브강 아래에 흐르는 지하수가 온천수라는 뜻. 숫자만큼 역사도 깊다. 2,000여 년 전, 고대 로마인이 펄펄 끓는 지하수를 뿜어내는 이 땅에 온천지를 개발해 유서 깊은 ‘목욕의 역사’를 만들었다.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세체니 온천Széchenyi Fürdö은 여행자와 현지인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는 헝가리 온천장 중 한 곳. 페스트 지구의 중심가 언드러시 거리에 자리한 ‘영웅광장’을 지나면 닿을 수 있는 쉬운 접근성이 이곳을 인파로 북적이게 하는 공신 중 하나다.
광장을 지나 나무가 우거진 숲, 배가 유유자적 떠다니는 강, 동화 속 장면 같은 버이더후녀드성이 눈에 띄면 그곳이 세체니 온천이다. ‘1879년 광산 기술자 지그몬드 빌모시에게 발견된 후 1931년 개장한 유럽 최대의 온천’이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곳답게 수질과 규모 모두 준수하다. 13종류의 온천탕과 사우나를 갖춘 안쪽으로 들어서면 네오바로크 양식의 고건축과 주변의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근사한 풍광이 시야에 펼쳐진다.
지하 약 1,000m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온 약 75℃의 온천수는 황산염·칼슘·마그네슘·탄산수소·불소 등의 성분을 포함하며, 척추 질환· 관절염 등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온천욕을 끝낸 후엔 헝가리의 미식으로 허기를 채울 차례다.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수프 ‘굴래시Goulash’(헝가리어로는 ‘구야시’)로 속을 채운 후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레이프로 후식까지 아름답게 마무리해볼 것.
신비로운 푸른색 온천수, 아이슬란드 블루 라군
약 40℃의 온천수가 솟아나는 블루 라군은 천연 무기염류와 수초가 풍부해 피부병과 마른버짐에 효능이 있다.
칼데라와 용암지대, 간헐천 풍경으로 가득한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는 오로라와 함께 온천욕도 빼놓을 수 없다. 레이캬비크에서 약 40km 떨어진 그린다비크에 있는 블루 라군Blue Lagoon은 아이슬란드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로 종종 등장하는 온천 휴양지다.
드넓은 용암지대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온천수와 수면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그로테스크한 화산암이 빚어내는 초현실적 장면 덕에 많은 여행자에게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손꼽힌다.
자연 그 자체로 보이는 이 해수 온천은 놀랍게도 인간이 빚어낸 작품이다. 아이슬란드에서 쓰는 에너지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지열발전소에서 증기와 온수를 위해 추출한 지하수를 흘려보내 만든 인공 온천장이다. 갓 뽑아낸 용수를 계속해서 흘려보내는 시스템으로, 48시간마다 전체 용수가 교체되어 수질이 깨끗하게 유지된다. 미네랄과 천연 무기염류 그리고 수초가 풍부한 블루 라군의 온천수는 피부에 좋기로 유명하며, 우윳빛과 하늘빛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대부분은 피부를 매끈하게 해주는 천연 진흙 팩 ‘실리카 머드’를 얼굴과 몸에 바른 후 에어 매트를 띄워 유유자적 휴양하듯 온천욕을 즐긴다. 블루 라군의 신비로운 분위기, 약이 되는 뜨거운 물의 치유력을 좀 더 길게, 깊이 경험하고 싶다면 이곳을 ‘뷰’로 둔 호텔에서 하룻밤 머물자. 더 리트리트 앳 블루 라군 아이슬란드The Retreat at Blue Lagoon Iceland, 실리카 호텔Silica Hotel 등에서는 블루 라군을 프라이빗하게 즐길 수 있는 욕장과 스파 테라피, 트레킹 프로그램 등 흥미로운 공간과 경험을 선사한다.
세계 2대 유황 온천지, 대만 베이터우
베이터우는 대표적 유황 온천으로, 1년 내내 유황 연기로 가득해 마치 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온천 여행지로 대만을 선택했다면 자신에게 잘 맞는 온천수는 어떤 물인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타이베이 북서부, 시내에서 대만 도시철도 MRT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베이터우Beitóu는 라듐을 함유한 유황 온천으로 유명한 온천 마을이다.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고 면역력과 항산화 기능을 높여주는 라듐의 ‘치유력’을 체험하고자 많은 이가 이곳을 찾는다.
베이터우 온천 여행의 시작은 신베이터우역에서 시작한다. 역에서 5분 정도 걸어 나가면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에게 활짝 열린 공공 족욕장이 있는 푸싱 공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뜨거운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의 매력을 한껏 누려보자.
족욕을 마치고 75~100℃에 이르는 뜨거운 온천수의 진원지, 베이터우 디러구 호수를 둘러본 후 호수 주변에 포진한 노점에서 온천수에 삶은 달걀로 허기를 달래보자. 제대로 된 치유의 느낌을 받으려면 온천 호텔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호텔이 숙박객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대욕장을 다채롭게 갖추고 있다. 노천 온천탕을 운영하는 숙박 시설을 예약했다면 수영복 착용 여부를 꼼꼼히 체크하는 것이 좋다.
약이 되는 물, 달빛과 새벽 볕의 기운을 듬뿍 받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면 마을 구경을 제대로 즐겨보자. 역 주변에 한적한 산책을 즐기기 좋은 베이터우 공원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25’ 중 한 곳으로 꼽힌 베이터우 도서관을 비롯해 볼거리가 쏠쏠하게 모여 있어 타박타박 걸으며 여행하기 제격이다.
유적지에서 즐기는 온천의 멋, 튀르키예 히에라폴리스·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안쪽에 자리한 클레오파트라 앤티크 풀. 그리스·로마 시대 스타일로 장식된 수영장 안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튀르키예의 경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에서 역사가 시작된 히에라폴리스의 이름은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으로, 기원전 130년경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이 붙인 지명이다.
이곳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다랑이 논처럼 웅장하게 펼쳐진 석회 언덕인 파묵칼레Pamukkale가 있다. 이곳에서는 가볍게 족욕을 할 수 있다. 비키니 차림의 방문객들이 간혹 보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입욕이 금지되어 있으니 신비로운 층리만 감상할 것. 본격적인 온천욕을 즐기고 싶다면 더 안쪽에 자리한 ‘클레오파트라 앤티크풀’로 향하자.
그리스·로마 시대 스타일로 꾸민 정원, 대리석 기둥과 신전 터 등 유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온천장 안에서 온천 수영을 즐기는 독특한 경험이 가능하다. 욕장 곳곳 쉼터에 앉아 수원지와 직접 연결된 펌프를 통해 류머티즘, 관절염, 피부에 좋은 온천수를 개인 물병에 담아 마시거나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마셨다는 음료를 맛보며 ‘고대 왕족과 귀족의 휴양’을 만끽해보자.
단풍의 절정과 함께하는 온천, 일본 유후인
유후인을 대표하는 호수인 긴린코는 가을이면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단풍이 장관을 이룬다.
국경을 넘어 온천 여행을 떠날 때 규슈의 유후인Yuhuin은 많은 여행자의 첫 선택. 거리와 접근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도보로 쉽게 누릴 수 있는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정의 시작은 유노쓰보 거리다. 유후인역에서 내리면 곧장 나타나는 1.5km 남짓한 이 도로에는 공예품점과 기념품점, 오미야게 상점을 비롯해 식당, 카페 등의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온천장의 늦은 체크인 시각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면 이 거리에서 온천 증기에 찐 음식들로 차린 정식으로 배를 채워보자. 긴린코는 석양 무렵 호수 안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이 금빛으로 반짝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 유후인의 절경을 거울처럼 담는 이 호수는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금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비치는 가을에 절정을 이룬다. 호숫가를 천천히 산책하거나 풍경이 통창에 가득 담기는 찻집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도 좋다.
유후인에는 프라이빗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온천장이 즐비하다.
많은 여행자가 취향에 따라 전통식 료칸과 현대식 호텔 사이에서 머물 곳을 선택하지만 벳푸, 구사쓰에 이어 일본에서 온천수 용출량이 세 번째로 풍부한 곳답게 수질 좋은 온천장이 긴린코와 유후산 사이에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좀 더 특별한 현지인의 삶 속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싶다면 합리적인 비용으로 프라이빗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민박집을 선택지에 넣어보자.
유후인 곳곳엔 50년을 훌쩍 넘긴 작은 노천탕을 품은 여관과 B&B가 꽤 많다. 유후인의 온천수는 약알칼리성으로 신경통, 근육통, 관절통, 소화기 질환, 냉증, 피로 해소 등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저녁에 온천으로 원기를 회복했다면 일본에서 ‘파워 스폿(기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유후산 트레킹에도 도전해보자. ‘신의 산’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답게 절경을 자랑하지만, 등산 난도가 낮아 약 2시간이면 꼭대기에 닿는다. 정상에서는 유후인 분지와 벳푸만까지 조망할 수 있다.
글. 류진(여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