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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위기라고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재훈

2024.06.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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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연초부터 이어진 빅테크 기업들의 화려한 개발자 콘퍼런스가 끝나고 많은 이들의 눈과 귀는 마지막 남은 애플의 세계 개발자 콘퍼런스(WWDC 2024)로 쏠렸습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발표는 없었는데요. 행사가 열리기 전 많은 언론사들이 예상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조연설이 사전 녹화된 영상으로 발표된 이후 언론의 평가를 살펴보면 혹평의 비율이 높은 상황입니다. 대표적인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분명 이번 발표에서 혁신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내용들이 이어졌고, 대부분의 기능들은 이미 경쟁 기업들에서 발표한 내용들이라고 여겨질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애플스러웠던 발표였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예상 가능했던 WWDC 2024 

잠시 야구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야구에서 투수는 모든 타자에게 전력을 다해 던지기보다는 힘을 조절하여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빠른 공만 던질 경우 투수의 체력이 빠르게 소진될 뿐만 아니라, 타자들이 강속구에 익숙해져 공략당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느린 공(변화구)을 적절히 배합해야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고, 체력 안배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투수에게는 이른바 "완급조절(강약조절)" 능력이 필수로 요구됩니다. 이는 구속과 체력이 떨어지는 베테랑 투수들에게 특히 더욱 중요합니다.

완급조절 능력은 비단 야구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에서도 필요합니다. 이를 특히 잘 활용하는 기업이 바로 애플인데요. 이는 최근 WWDC에서 "One more thing"이 언급된 주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One more thing"은 제품의 혁신적인 변화가 있거나 새로운 제품 라인업을 발표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대사입니다. 초반의 애플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위해 이 대사를 자주 사용했지만, 어느덧 베테랑이 된 지금의 애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이 대사의 사용을 줄였는데요. 팀 쿡이 CEO 자리에 오른 이후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14년 애플워치 발표
- 2017년 아이폰 X 발표
- 2023년 비전프로 발표

"One more thing"이 사용된 해를 '빠른 공'에 비유한다면, 그 사이에 해 들은 '느린 공'을 던진 시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작년에 비전프로를 소개하며 '빠른 공'을 사용했기에 올해는 '느린 공'을 던질 거란 예측이 가능했는데요. 즉,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표현보다는, 예상 가능했던 애플스러움이 드러난 발표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애플은 느린 공도 강력하다

다시 야구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앞서 투수는 느린 공을 섞어가며 던져야 한다고 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느린 공이란 타자에게 치기 쉬운 공을 던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느린 공마저도 공략하기 어렵도록 하는 것이 좋은 투수의 조건 중 하나인데요. 애플은 이 느린 공을 특히 더 잘 활용하는 기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플의 느린 공은 빠른 공에 비유되는 혁신적인 기술을 제품에 잘 녹여내어 사용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해는 AI라는 기술을 제품 안에 녹여내는 시기였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핵심에는 '진짜로 잘 활용할 수 있는 온-디바이스 AI'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성형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생활 속에 점차 침투되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그래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데?"라는 의문을 가지는 시점이기도 한데요. 애플은 "AI를 이렇게 사용할 수 있어!"라고 명확한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애플은 기존에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로 표현되던 AI를 'Apple Intelligence'라고 새롭게 명명했는데요. 그동안 활용성이 떨어져 애물단지 취급받던 Siri는 Apple Intelligence를 만나 매우 똑똑해졌으며, 이를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 회의 일정이 변경되어 딸의 콘서트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을지 물어보면 과거 메시지, 시간, 날짜, 교통 정보까지 확인하여 답변해 줍니다.
- 친구가 메시지로 주소를 보냈을 때 "이 주소를 연락처 카드에 추가해 줘"라고 요청하면 해당 인물의 정보에 주소를 추가해 줍니다. 
- 분홍색 코트를 입은 친구의 사진을 요청하면 사진 앱에서 찾아주며, 이어서 "이것을 돋보이게 만들어달라"라고 요청하면 자동으로 편집해 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Apple Intelligence는 사용자가 스마트폰을 사용했던 기록을 기반으로 작업을 수행해 준다는 것과 화면을 같이 보면서 작업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앱을 넘나들며 작업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스마트폰의 사용법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것은 물론이며 사용자보다 사용자의 정보를 더 잘 알고 있는 'Apple Intelligence'가 스마트폰 사용을 도와준다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디바이스 내에서 연산 처리를 완벽하게 돕는 그들의 반도체(M1~M4) 덕분이며, 온 디바이스에서 처리할 수 없는 작업은 개인정보 보호에 특화된 '프라이빗 클라우드'를 통해 처리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차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공고히 쌓아 온 이른바 '닫힌 생태계'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여 보다 높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위기라 부르기엔 이르다

올해 던진 느린 공은 "우리를 잘 아는 AI"라는 콘셉트에 충실하여 사용성을 극대화했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발표였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에 가장 주효했던 방식인 "적용되는 기술들은 어렵지만 사용자는 몰라도 돼. 그저 쉽고 편하게 쓰면 돼" 기술을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로써 올해 주요 빅테크 기업의 개발자 콘퍼런스는 모두 막을 내렸습니다. 앞서 요즘IT에 발행한 MS 빌드 2024 분석글 말미에 올해는 '생성형 AI 전쟁 시즌 2'가 시작됐고, 각 업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애플 역시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안정적으로 잘 발표했다고 판단됩니다.

애플의 진정한 위기를 거론하려면, 애플이 작정하고 빠른 공을 던졌는데 그 빠른 공의 위력이 감소됐을 때가 진정한 위기라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 글은 'Tech잇슈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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