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장엄한 자연이 매력적인 도시다. 알프스 3대 미봉이라 불리는 몽블랑, 융프라우, 마터호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연신 감탄이 나오지만 여기에 특별함을 더해보는건 어떨까? 스위스는 가치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하이엔드급 시계 브랜드의 발상지로 전혀 다른 매력을 선사하기도 한다. ‘스위스 워치 밸리’를 따라 펼쳐진 제네바, 라쇼드퐁, 빌-비엔은 물론 샤프하우젠과 루체른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시간의 예술을 만나러 가보자.
종교개혁으로 인한 시계산업의 태동지, 제네바
스위스 보Vaud주에 위치한 제네바Geneva는 종교개혁의 발상지로도 잘 알려져 있어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동시에 시계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이기도 하다. 16세기 후반 종교 박해를 피해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망명한 시계 장인들의 기술력 전수, 장 칼뱅의 보석 금지령으로 보석 세공 기술력이 자연스럽게 시계산업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제네바는 스위스 시계산업의 태동이 되었다. 지금도 스위스 하이엔드급 시계들은 ‘제네바 실Geneva Seal 인증’이 필수다.
시계산업의 메카답게 제네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 중 하나가 바로 꽃시계다. 코르나뱅Cornavin 기차역에서 나와 시계 브랜드 숍들이 위치한 몽블랑 거리Rue du Mont-Blanc를 지나서 제네바 호수를 건너면 바로 닿는, 영국인 정원 자르댕 앙글레Jardin Anglais에 지름 5m 크기의 꽃시계가 있다. 약 6,500송이가 넘는 꽃시계는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선보인다. 약 2.5m 길이의 꽃시계 초침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다.
꽃시계를 지나면 아름다운 제네바 호수 산책길이 시작된다. 제네바 호수는 영어식 이름으로 프랑스어로는 레만 호수라 한다. 레만 호수를 수직으로 가르며 140m 높이로 치솟아 오르는 제토Jet d’Eau 분수 역시 제네바의 상징이다. 제네바 호수 곳곳에는 CGN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이 증기 유람선을 타고 제네바를 속속들이 유랑하다 보면 프랑스 론알프Rhône-Alpes의 아름다운 중세 마을 이브와르Yvoire까지도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파텍 필립 시계 박물관Patek Philippe Museum은 지난 5세기에 걸친 유럽 시계의 전통과 역사, 제작에 관한 모든 전시와 자료가 총망라되어 있다. 매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리는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and Wonders 시계 박람회’는 그 가치와 유명세가 점차 확장되어, 세계 최대 규모의 시계 박람회였던 ‘바젤 월드Basel World’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전 세계 시계 브랜드와 애호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1, 2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쇼드퐁 ©스위스정부관광청
도시가 시계 DNA 그 자체, 라쇼드퐁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주에 위치한 라쇼드퐁La Chaux-de-Fonds은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르로클Le Locle과 함께 마을 전체가 시계 제조 산업 계획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도시다. 도시가 시계 DNA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유명 관광지로 이름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발굴의 매력이 있는 도시다. 라쇼드퐁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시계 박물관을 방문하거나, 하이엔드 시계 제조 공정 투어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
제네바 공항에서 라쇼드퐁에 이르는 기차 여정은 특히 아름답다. 기차가 레만 호수와 뇌샤텔 호수를 바로 옆에 두고 지나기 때문이다. 기차 여정 자체가 여행인 스위스에선 한국과의 시차에 잠을 청하는 것조차 아까울 때가 많다. 라쇼드퐁 기차역에서 내려 5~10분이면 시계 박물관에 도착한다.
라쇼드퐁은 건축 애호가들도 마음을 빼앗기는 곳이다. 바로 현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덕이다. 라쇼드퐁 출신인 그의 첫 건축 작품 빌라 팔레Villa Fallet를 비롯해 시계공인 아버지를 위해 채광이 가득한 창을 낸 메종 블랑슈Maison Blanche 등 그의 초기 건축물 10여 곳을 라쇼드퐁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18~19세기에 걸쳐 마을의 큰불을 여러 차례 경험한 후 르로클과 함께 오직 시계산업만 염두에 두고 도시를 계획했기에, 라쇼드퐁의 도시 구획과 건물 모양 모두 시계공들의 요구에 맞춰 설계되었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양식이 두드러지는 것도 라쇼드퐁만의 독특한 매력임을 기억하며 도시를 거닐어보자.
스위스식 독일·프랑스 문화가 공존하는 곳, 빌-비엔
빌-비엔Biel-Bienne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쓰는 곳이다. 풍기는 인상은 독일인데, 그들의 정서는 프랑스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 점심시간을 귀하게 쓰는 프랑스어권답게 점심시간이면 구시가 상점 중 문을 닫는 곳이 꽤 많다. 인파로 붐비지 않아 골목 여기저기를 촘촘히 둘러보기엔 더욱 좋다. 15세기에 지어진 교회와 중세풍 건물들, ‘기사의 분수’ 등이 여행자들에게 여유로운 분위기를 선사한다.
성수기를 조금 벗어나는 시기라면, 더욱 고요하고 평화로운 구시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화·목·토요일 아침에는 뷔르그광장Burgplatz으로 향하자. 이곳에서는 활기찬 아침 야외 시장이 열려, 현지인으로 북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빌-비엔 호수 길을 따라 라뇌브빌La Neuveville까지 이어지는 포도밭 하이킹도 추천한다. 깊어가는 가을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고, 와인 테이스팅 센터에서 뇌샤텔주의 와인도 맛볼 수 있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머물렀던 생피에르섬도 방문해 볼 가치가 있다. 빌-비엔 호수에 떠 있는 아름다운 작은섬으로 소박한 포도밭과 생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자연보호 구역이라,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사실 빌-비엔은 시계 브랜드 오메가와 스와치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세계 최대 목조 건물로 완공된 스와치&오메가 캠퍼스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Shigeru Ban이 설계했다. 이곳을 방문하면 오메가 박물관과 스와치 플래닛으로 구성된 ‘시간의 도시 박물관Cité du Temps’을 둘러볼 수 있다.
IWC 브랜드 가치가 도시의 힘으로, 샤프하우젠
시계 브랜드 IWC 로고에 함께 적혀 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샤프하우젠Schaffhausen. 그래서 그 이름만으로도 시계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도시이기도 하다. IWC는 뛰어난 엔지니어링 기술과 견고하고 정밀한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하이엔드급 IWC의 브랜드 가치가 곧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IWC 본사는 라인강 변에 자리해 라인강의 수력을 통해 산업 생산력을 높여왔다. IWC 박물관과 함께 샤프하우젠의 여정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다. 스위스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 샤프하우젠은 중세 느낌이 짙은 곳이다. 각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퇴창은 스위스 북부 독일어권 소도시 건물양식의 가장 큰 특징인데, 샤프하우젠의 구시가에는 약 170여 개가 넘는 퇴창과 건물 외벽의 다양한 프레스코화가 인상적이어서 도보 여행이 즐겁다. 특히 구시가에 위치한 하우스 춤 리터Haus zum Ritter는 알프스 북쪽 지방에서도 르네상스 양식의 프레스코화 특징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도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무노트Munot도 샤프하우젠의 랜드마크로 잘 알려져 있다.
라인강 상류에 위치한 라인폭포Rheinfall는 샤프하우젠 여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라인폭포는 높이 24m, 폭 114m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유람선을 타고 즐길 수 있고, 폭포 주변에 위치한 두 성에서도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라우펜성Schloss Laufen에서는 라인폭포를 바로 눈앞에서 즐길 수 있으며, 뵈르트성Schloss Wörth에서는 라인폭포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스위스 시계 쇼핑의 천국, 루체른
스위스의 정중앙에 위치한 루체른Luzern은 교통의 요지로, 많은 여행자들이 오가는 대표적인 스위스의 여행지다. 로이스강 위에 놓인 목조 다리 카펠교는 도시의 상징적인 명소로, 이곳을 중심으로 구시가를 가볍게 둘러볼 수 있다. 기차역 옆에 자리한 카카엘KKL 문화 컨벤션 센터는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한 건축물로, 이곳에서 열리는 루체른 페스티벌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루체른에는 특별히 유명한 시계 브랜드가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 리테일 산업의 발상지다. 하이엔드급 시계의 멀티 브랜드를 취급하는 부커러Bucherer와 귀벨린Gübelin이 바로 이곳 루체른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1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커러는 롤렉스와의 오랜 파트너십을 통해 스위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고급 시계 리테일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루체른 시내 부커러 매장에 여전히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귀벨린은 부커러보다 앞서 보석 소매업으로 시작해서 점차 시계로 그 비즈니스를 확장했으며, 현재는 스위스 전역에 고급 보석과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를 유통하고 있다. 이 두 리테일 브랜드 덕분에 루체른은 여전히 고급 시계 쇼핑과 리테일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다.
또한, 루체른은 근교의 2,000m급 알프스산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루체른에서 유람선을 타고 산들의 여왕 리기Rigi로 이동하거나, 알프나흐슈타트Alpnachstad를 거쳐 용의 산으로 알려진 필라투스Pilatus로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이 여정은 스위스 중부 알프스의 가장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여정조차 또 하나의 목적지가 되는 스위스 여행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 조원미(<스위스 셀프트래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