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애니메이션·게임 축제 ‘AGFAnime×Game Festival 2024’에 7만2,081명의 관객이 몰렸다. 이는 전년 대비 10% 증가한 수치다. 하위문화로 시작된 서브컬처Subculture가 이제는 주류 문화를 넘어서며 전 세계 팬덤과 경제를 움직이는 강력한 파급력을 지니게 됐다. 서브컬처는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서브컬처 산업의 폭발적 성장
서브컬처는 사전적으로 ‘비주류 문화’나 ‘하위문화’를 의미한다. 이는 순수문학, 고전 미술, 클래식 음악 등 전통적이고 고급문화로 인정받는 ‘하이 컬처High Culture’와 대조적 개념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최근 회자되는 서브컬처 개념은 사전적 의미보다 한층 더 좁아서 대개는 미소녀·미소년이나 그에 준하는 매력을 갖춘 캐릭터를 앞세운 콘텐츠를 특정해 말한다. 상당수는 만화, 애니메이션, 피겨, 웹 소설, 웹툰, 게임 등의 형태다.
서브컬처가 지향하는 미의식은 하이 컬처에 비해 말초적末梢的이다. 정신과 영혼 차원에서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하이 컬처나 순수예술과 달리 대중의 욕구와 취향에 적극적으로 영합한다. 그렇기에 잠재 고객의 소비 패턴이나 유행을 예민하게 감지해 그에 맞춰 발 빠르게 변화하는 경향이 짙다. 보편적 욕망과 쉽사리 결합하는 만큼 각계각층의 소비문화와 원활히 어우러져 매출을 촉진하는 특성 또한 매우 강하다. 용어에서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대중 영합’이 경제적 측면에서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국내 서브컬처 시장은 최근 몇년간 다채롭게 변화하는 유행과 트렌드를 민감하게 반영하며, 적극 발맞춘 덕에 경이로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삼정KPMG가 2023년 10월에 발표한 보고서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향한 콘텐츠 다양화 전략’에 따르면 국내 매출 상위 10위 내에서 서브컬처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10%에서 2022년 30%로 대폭 증가했다.

2 국내 최대 애니메이션·게임 축제인 ‘AGF 2024’에는 국내외 약 75개 업체와 7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참가했다. ©YOSTAR
AGF처럼 서브컬처 애호가와 이들을 마케팅 타깃으로 하는 기업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 또한 곳곳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인 종합 서브컬처 행사 ‘일러스타 페스’는 최근 한 해 누적된 유료 참가자 수가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일러스타 페스의 시장성을 직접 평가한 자료는 없지만, 성격과 규모가 비슷한 행사에 빗대 추산할 수는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9년에 발표한 ‘글로벌마켓 리포트 코믹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종합 서브컬처 행사 ‘샌디에이고 코믹콘SDCC’엔 매년 13만 명 이상이 참석해 8,470만 달러약 1,170억 원를 소비했다. 여기서 발생한 세금 수입만 헤아려도 310만 달러약 42억8,000만 원에 달한다. 국가별 시장 규모나 물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일러스타 페스의 경제성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장르는 서브, 인기는 메인
최근엔 서브컬처와는 전혀 무관한 상품조차 콜라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 편의점 GS25가 지난해 5월 넥슨의 서브컬처풍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와 협업해 출시한 빵은 출시 47일 만에 200만 개 넘게 팔려나갔다. 맛이나 성분에서 다른 상품과 차별화될 정도로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블루 아카이브 캐릭터 디자인을 포장재와 동봉한 스티커에 반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구매할 이유’를 충족한 서브컬처 팬덤은 GS25 편의점마다 줄을 서며 폭발적 매출을 이끌어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해 3월 넥슨게임즈와 제휴해 제품 케이스와 스트랩 케이스 등 스마트폰 액세서리를 블루 아카이브 캐릭터로 꾸민 ‘갤럭시 S24 울트라 액세서리 블루 아카이브 에디션’을 출시했다. 상품가는 33만9,000원 으로 스마트폰 단말기는 포함하지 않은 오로지 액세서리 가격이었다. 결코 저렴하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었음에도 판매 개시 이후 재고 2,000개가 모두 소진되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 게임 캐릭터 스티커가 랜덤으로 동봉된 블루 아카이브 빵은 초도 물량 100만 개가 빠르게 소진될 정도로 팬들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GS25
실제로 서브컬처 산업은 소비자 욕구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구조인 만큼 고가 상품에 대한 구매욕을 효과적으로 끌어낸다. 서브컬처 마니아들은 애호하는 상품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국내 고급 피겨 제작사 JND스튜디오가 출시한 295만 원의 ‘할리퀸 피겨’는 스토어 오픈과 동시에 준비된 수량이 모두 매진되었다. 발매 당일에는 국내에서만 JND스튜디오 홈페이지에 8,000명이 동시 접속하며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확실한 마니아층이 있는, 장르 자체는 서브지만 인기만큼은 메인이며, 그 파급력은 이미 시장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서브컬처의 도전 과제와 미래
정부 역시 국내 서브컬처 시장의 소비력과 경제적 가치를 이미 인정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피겨, 애니메이션 굿즈 수집 등을 포함한 국내 키덜트 시장 규모가 2021년에 이미 1조6,000억 원대에 도달했으며, 향후 최대 1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도 2014년엔 5,000억 원에 불과하던 키덜트 시장은 7년 만에 3배 넘게 성장했다.
지난 2023년 12월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콘텐츠 산업에서의 서브컬처 트렌드 및 시사점’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글로벌 콘텐츠 수출액은 124억5,290만 달러약 18조779억 원로 전 세계 국가 중 7위에 달했다. 또 2021년 6,687억 엔약 6조1,179억 원이던 일본의 서브컬처 애호가들 대상 시장 규모가 2022년에는 7,164억 엔약 6조6,185억 원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2019년 기준으로 3억9,000만 명에 달하던 중국 내 서브컬처 이용자 수는 2022년에는 4억 명을 넘어섰다.
국내에서의 서브컬처 시장 팽창과 성장세는 이미 경이로운 수준이며, 국경 너머 세계에서도 한국의 서브컬처 IP는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 데다 우리의 무대가 될 글로벌 시장은 나날이 넓어지는 추세다. 경제·산업적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이만큼 유망한 시장도 드물다.

대중의 욕망과 취향에 적극 영합하는 말초적 콘텐츠라는 것은 결국엔 인간의 기본 욕구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제작되기 쉽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서브컬처 관련 콘텐츠에서는 캐릭터 복장이나 노출도 등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도 종종 있는 편이다. 여느 장르가 그렇듯 묘사가 상궤를 넘은 작품은 일부 소수일 뿐이며, 몇몇 예외 때문에 서브컬처 산업군 전체를 오해하고 외면하는 것은 경제적 손해가 지나치게 막심하다.
목재가 살짝 벌레 먹거나 상했다 해도 전부를 버리지 않듯, 서브컬처 또한 적절한 검수와 통제를 거쳐 유용한 부분만 추려 이롭게 활용하면 상당한 경제 효과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에서 다루지 않던 독특한 주제와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또 과거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되던 문화적 경계가 서브컬처를 통해 희미해지며 세대 간 문화 격차가 감소하는 효과도 있다. 이 말인즉슨 문화의 향유 주체인 우리의 관점과 관련 기관의 적절한 규제에 따라 서브컬처의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행히 지금의 서브컬처는 단순히 비주류 문화에 머무르지 않고 주류 문화와 융합하며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팬덤 중심의 강력한 소비력과 창의적 콘텐츠는 서브컬처가 미래 산업과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주류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이 세계를 바꾸는 큰 파도가 되었듯, 서브컬처는 앞으로도 새로운 문화와 가치를 창조할 것이다.
글. 문현웅(스타라이크 최고전략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