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산업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초거대 모델은 실시간 학습과 추론을 반복하고, 데이터 센터는 24시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전력 소비가 존재한다. 그 규모만 한 국가의 연간 총전력 사용량과 맞먹는다. AI의 성장은 이제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수급과 환경, 인프라 전반의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전력 수요를 안정적이고 탄소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해법이다.
폭증하는 AI 전력 수요, SMR이 답이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기술의 폭발적 발전은 인간 사회 전반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공지능 기술의 고도화에는 막대한 전력 소비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실제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 세계 데이터 센터, 암호화폐, 인공지능 등을 포함한 인프라의 전력 소비량은 약 460테라와트시TWh였으며, 2026년에는 최대 1,050테라와트시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전 세계 전력 소비량의 2~4%에 해당하는 수치로, 우리나라의 연간 총전력 사용량약 550테라와트시과 맞먹는 규모다. AI의 성장이 향후 에너지 수급과 환경 측면에서 얼마나 중대한 이슈가 될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AI와 데이터 센터는 연산에 필요한 전력뿐 아니라,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 에너지 또한 추가로 필요하다. 더욱이 이러한 시설은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고 가동해야 하므로 전압과 주파수의 안정성 면에서 수준 높은 전력 품질이 요구된다. 현재로서는 간헐적 공급원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고, 무엇보다 고신뢰·고품질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원 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AI 및 데이터 센터는 응답 지연 시간을 줄이고 양질의 네트워크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넓은 부지가 있는 교외보다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나 그 인근 지역에 위치할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최근에는 탄소 중립과 기후 위기 대응에 대한 요구가 크게 증가하면서, 이들 시설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원 또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까다로운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전력원으로, 현재 가장 각광받는 것이 바로 소형모듈원전Small Modular Reactor, SMR이다.
SMR이 바꾸는 원자력의 미래
원자력발전은 1950년대 개발된 이후 줄곧 대형화를 추구해왔다. 대형 원전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제성을 확보하기 쉽다. 즉 설비 용량이 커질수록 전체 비용은 증가하지만, 단위 용량당 건설 단가는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대형화는 한 기에 저장되는 방사성물질의 양을 크게 늘리는 단점도 따른다. 극히 낮은 확률로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피해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대형 원전 주변 20~30km를 방사선비상계획 구역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며, 이로 인해 인구 밀집 지역은 부지 선정에 제약이 있다.
SMR은 한 기에 저장하는 방사성물질의 양이 적고, 사고 시 대피가 필요 없는 수준으로 설계하는 것이 특징이다. 첨단 제조 기술을 활용한 모듈 반복 생산으로 시공 기간을 줄이고, 경제성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IT 기술을 접목해 운전 인력을 최소화하고, 인적 오류와 운용 비용 도 함께 줄이고 있다. 물론 용량당 건설 비용은 대형 원전에 비해 다소 높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심 인근에 설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수요지 근처에서 전력을 공급하는 분산형 발전소로서의 이점이 크다. 이를 통해 AI나 데이터 센터 등 고품질 전력 수요처에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송전망 구축 부담도 줄일 수 있다.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안정성 문제도 SMR이 일부 해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SMR은 단순한 수요지 대응을 넘어 변동성이 큰 재생 에너지원의 보완 전력원으로도 유용하다. 배터리 저장 장치가 일부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전력망 보조에 필요한 규모를 충당하기엔 한계가 있다. SMR은 출력이 작고 기동 속도가 빠르며 유연한 운전이 가능해 태양광이나 풍력의 변동에 즉각 대응하는 ‘조정 발전원’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는 국가 전력 품질 향상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SMR 투자에 나선 빅테크와 한국 기업
SMR의 가능성에 주목한 미국의 주요 IT 기업은 이미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MR의 상용화를 기다리지 않고, 2024년 폐쇄된 미국의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을 재가동해 자사 데이터 센터에 전력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2008 년부터 테라파워TerraPower를 통해 GE히타치와 함께 4세대 SMR 나트륨Natrium을 개발 중이며, 이 프로젝트에는 SK·한국조선해양·한국수력원자력 등 한국 기업들도 참여하고 있다.
구글 역시 2024년 트리소TRISO 핵연료 기반의 용융염 냉각 SMR을 개발 중인 카이로스 파워Kairos Power에 투자했고, 2030년부터 전력을 공급받을 계획이다. 트리소는 삼중 코팅 구조로 방사성물질 누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 기존 원전보다 훨씬 높은 안전성을 제공한다. 같은 연료를 사용하는 엑스에너지X-Energy는 아마존에서 투자를 받아 데이터 센터 전력 공급을 준비 중이다.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발맞춰 국내 기업 역시 SMR 관련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GS건설·삼성물산·두산에너빌리티·SK·한국조선해양·삼성중공업·한국수력원자력·현대건설 등이 다양한 국내외 SMR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한국 정부도 SMR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2035년까지 혁신형 SMR 건설을 추진하며, 하나의 모듈이 170메가와트 용량을 갖고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1,000배 이상 높은 안전성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증에 성공할 경우 탄소 중립 실현은 물론,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대체와 인구 밀집 지역 내 고품질 전력 공급 수단으로도 SMR이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지난해 6월, 경남 창원시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 공장 내부에 소형모듈원전 부품을 제작하는 공간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지구의 에너지에서 미래의 플랫폼으로
흔히 “원자력은 지구의 에너지”라고 말한다. 이는 지진이나 화산 같은 지각 활동에 필요한 근본적 에너지가 지구 내부에서 일어나는 원자핵 반응에 기반한다는 연구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원자력에너지를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청정하고 고도화된 미래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SMR 기술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누구나 믿고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 에너지’로 재탄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아가 SMR은 AI 기술과 결합해 ‘지능형 원전’으로 진화할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운전 중 발생하는 방대한 양의 설비 상태, 방사선 수치, 온도와 압력 변동, 냉각 계통 동작 등의 빅데이터를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최적의 운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불필요한 정지 시간을 단축하고,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사전에 문제를 예측하고 차단해 사고 위험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이러한 AI·원자력 융합 기술이 활성화된다면, 미래 에너지 산업은 단순한 ‘에너지 공급’ 수준을 넘어 데이터 기반의 지능형 통합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AI 산업의 발전과 탄소 중립의 동시 실현에 크 게 기여할 것이다.
글. 이정익(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