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11시 열리는 슬케팅 게이트
컬리에서 요즘 핫한 빵을 고르라면 단연코 타르틴 베이커리의 ‘슬랩’입니다. 매일 오전 11시 오픈되는데요. 얼마나 인기인지 컬리 멤버쉽에 한해 1인 1개만 구매할 수 있도록 제한을 걸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선 ‘슬랩 구매 성공하는 법’, ‘슬랩 소분하는 노하우’, ‘슬랩 샌드위치 레시피’가 공유되고 있고요. 유튜브에는 직접 만드는 방법까지 소개하는 영상까지 만들어집니다.
출처: 인스타그램 캡처

1인 가정이 늘고 있고, 더 작게 더 편리하게 만드는 F&B 시장에 이렇게 큰 빵이 그렇게 큰 인기를 끌 줄 그 누가 알았겠어요. 대체 어떤 빵이고, 왜 이렇게 인기인지 천천히 음미해 볼게요.
도대체 슬랩은 어떤 빵이길래…
타르틴 베이커리의 '슬랩(Slab)'은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베이커리인 타르틴에서 개발한 사워도우 계열의 식사빵으로, 특히 샌드위치용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슬랩(Slab)이라는 이름은 영어로 "판" 또는 "두껍고 넓은 조각"을 뜻합니다. 타르틴에서는 커다란 판 형태로 구운 포카치아 스타일의 빵을 의미하는데요. 하지만 일반 포커치아보다 훨씬 더 촉촉하고 깊은 풍미가 있습니다.
타르틴 창립자인 채드 로버트슨(Chad Robertson) 은 "매장에서 갓 구운 빵을 넓게 잘라내 손님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서 슬랩을 만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유럽 농촌 빵 문화에서 큰 덩어리로 구워 오래 먹던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파티용 빵' 또는 '나누어 먹는 빵'을 콘셉트로 한 것이지요.

슬랩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 쫀쫀한 식감이 매력적입니다. 수분 함량이 높아서 찢었을 때 결이 살아있거든요. 사워도우 특유의 산미가 너무 시지 않고 은은한 깊은 맛을 주고요. 올리브 오일 향이 빵 전체에 배어 있어서 향미도 좋습니다.
이렇게 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빵이라니
슬랩은 파티용 빵을 재해석한 빵답게 크기가 매우 큽니다. 인기는 알겠는데, 이렇게 큰 빵이 진짜 맛있냐고요? 빵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크기를 크게 해서 구우면 더 맛있대요. 왜 그럴까요?
크게 구우면 구울 때 수분 손실이 적어서 촉촉합니다.
수분이 많으면 반죽이 오래 발효되면서 효소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그래서 밀가루 속 당분, 감칠맛이 더 깊게 우러납니다. 타르틴베이커리는 유기농밀가루와 세몰리나 듀럼밀을 사용하는데 밀가루의 풍미가 드러나는 슬랩의 특징을 잘 살린 선택이라 할 수 있죠. 수분이 많아지면 맛과 식감을 전체적으로 좋게하지만, 만들기는 훨씬 어려워 집니다. 높은 수분 반죽을 아주 조심스럽게, 접고 쉬게 하면서 천천히 키우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거죠.
큰 판 형태로 만드는 만큼 겉 표면을 균일하고 두껍지 않게 구울 수 있어요. 균일한 두께는 샌드위치로 만들었을 때 다른 속재료와 밸런스를 맞춥니다.
사워도우는 가운데 부분이 봉긋한 모양입니다. 샌드위치로 만들려면 어쩔 수 없이 가운데 부분과 끝부분의 크기가 제각각이게 되죠. 또한 후라이팬에 구울 때 촉촉한 면이 팬 바닥에 닿게 되어서 딱딱한 부분의 비율이 그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넙적한 판 모양의 슬랩은 가운데와 끝 부분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샌드위치로 만들었을 때 맛이 좋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큰 기공(공기 구멍)이 가능해서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을 구현합니다.
크럼(Crumb)은 빵 속의 단면, 즉 속살의 구조를 뜻하는 용어예요. 빵을 자르거나 찢었을 때 보이는 기공(공기구멍) 구조죠. 촉촉함, 결의 모양 등을 통틀어 ‘크럼’이라고 부릅니다. 크럼에는 오픈 크럼과 타이트 크럼이 있어요. 오픈 크럼은 치아바타나 슬랩, 사워도우 같은 컨츄리빵의 형태고, 타이트 크럼은 식빵처럼 공기구멍이 작고 촘촘한 형태를 말하는데요. 크럼이 열려 있으면 올리브오일이나 스프레드, 스프를 찍거나 발라먹을 먹을 때 속까지 스며들어서 더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어요.
뭐가 들어갔고, 뭐가 다를까?
슬랩의 재료로는 천연 발효종 르방(levain), 듀럼밀 세몰리나(semolina), 정제수, 올리브오일, 천일염이 들어갑니다. 사워도우와 비슷한데, 수분 비율이 더 높고 산미는 낮아요. 치아바타랑 비슷하지만 이스트를 사용해 발효한 치아바타와 다르게 르방을 사용해서 더 깊은 풍미가 있죠. 사워도우와 포카치아의 중간쯤 되는 맛과 식감입니다. 아래 셋의 차이를 정리해 봤어요.

비슷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데요. 특히 슬랩은 샌드위치에 특화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타르틴 슬랩의 품귀현상을 이끈 이유는 과연 맛뿐일까요?
타르틴 슬랩 품절 대란!? 대체 왜?
컬리의 한정판 마케팅인가?
컬리의 슬케팅에 실패한 이들도 ‘슬랩 사는 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살 수 있던데?ㅋㅋ’라고요. 72시간 느리게 발효하므로 수량이 제한적이라던 컬리의 말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매장에서도 구매 수량 제한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합니다. 갓 구운 넓적하고 큰 빵을 매장에 온 고객에게 직접 제공하고 싶은 타르틴 창업자의 의도가 전설처럼 이어지는 걸까요?
출처: 블로그 <다은처럼>
의도야 어찌됐든 한정판 마케팅은 컬리와 타르틴베이커리를 윈윈 구도로 이끌고 있는 듯합니다. 고객들은 이제 컬리 앱 장바구니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기 보다는 내비게이션 앱을 켜서 타르틴베이커리를 찍고 있습니다.
타르틴: 컨츄리 시티즌을 위한 베이커리
매장을 방문해보면 타르틴 베이커리가 얼마나 컨츄리를 도시적으로 풀어헤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련되고 미니멀한 테이블과 체어, 타르틴의 시그니처인 둥근 조명, 시티뷰의 통창을 각 지점마다 조금씩 변주해가며 배치하고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마저 도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왼쪽 위부터 타르틴베이커리 이태원점 출처: 블로그 <데일리로그> / 타르틴베이커리 용산점 출처: 블로그 <여의도 직딩 펄피치네> / 타르틴베이커리 한남점 출처: 블로그 <무니블로그>
식사빵 메뉴들은 어떤 재료로 어떤 맛을 냈는지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사워도우를 ‘컨트리’라는 용어로 재정의하려는 듯한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애플이 노트북을 ‘맥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요.


타르틴 베이커리 한국의 오프라인 매장 수는 현재 6개 입니다. 서울 주요 핫플인 청담, 이태원, 한남, 용산아이파크몰, 북촌 그리고 판교에 있죠. 실은 타르틴베이커리는 2018년에 오픈한, 꽤 오래된 수입 제빵 브랜드인데요. 아주그룹의 첫 외식업 투자로 주목받기도 했었죠. 도산점, 분당 AK점, 남양주점, 홍대점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폐점하게 되는데요. 슬랩이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탈출구가 되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슬케팅에 지쳤다면, 타르틴 매장을 방문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슬랩은 언니가 산 빵
슬랩의 인기를 ‘이토록’ 불타오르게 한 공에는 컬리와 타르틴만 있는 건 아닙니다. 구독자 11.4만(2025년 4월 기준) 크림 박 님의 <우런니 샌드위치> 시리즈는 슬랩의 인기에 한 몫하게 되는데요. <우런니 샌드위치>는 언니(크림 박)가 출근길 아침마다 샌드위치를 싸는 모습을 동생이 촬영해 올리는 시리즈입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반은 언니가 출근길에 챙겨가고, 남은 반은 동생의 아침이 되는 식입니다. 새롭고 다양한 샌드위치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을 잘 이끌면서, 자매의 케미가 돋보이더라고요.
출처: 유튜브 <크림 박_우런니 샌드위치>
슬랩은 언니가 만든 ‘흉내 내고 싶은 샌드위치를 만드는 빵’, ‘저런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어서 직접 만들어 먹는 빵’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우린 코스트코와 이케아로 빌드업한 소비자다
컬리와 타르틴 그리고 우런니가 불을 붙인 데 기름을 부은 이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제품을 홍보하는 프로슈머,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코스트코와 이케아에 잘 훈련된 소비자입니다. 코스트코에서 맥시멀로 사고, 먹을만큼 소분해 냉동고에 쟁이는 법을 배웠고요. 이케아에서 산 가구를 나만의 가구로 조립하는 법을 익혔지요.
타르틴 베이커리의 슬랩은 1인 가구의 증가로 크기가 코딱지만 해진 베이커리빵의 흐름을 정확히 턴어라운드 시킵니다. 슬랩은 크게 사고 나만의 빵으로 조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슬랩은 나와 식구들의 양에 맞게, 스프에 먹을 빵과 샌드위치용 빵을 구분해서 소분할 수 있거든요. 소분하는 아주 작은 불편함만 감수한다면요. 가성비와 취향을 모두 만족시키는 빵, 우리는 어쩌면 슬랩이 나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출처: 블로그 <아들 둘 키우다 …> / 블로그 <pinkbeam1님의 블로그> / 블로그 <나만의 작은 세계>
/ 블로그 <일상의 일상>
슬랩은 컬리의 매스티지 전략을 강화하는 핵심 제품
컬리는 프리미엄 식품을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이제는 대중성과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매스티지' 전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 속에서 슬랩은 샌드위치에 최적화된 빵으로, 치즈, 햄, 잼 등 다양한 식재료와 함께 구매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슬랩이 단순한 제품을 넘어, 다른 제품의 구매까지 유도하는 '크로스 셀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크림박님의 샌드위치 재료를 한번 보시죠.

어마어마 합니다. 슬랩을 마케팅했을 뿐인데 이 모든 재료들을 함께 사다니요. 슬랩을 사지 못한 고객들이 다른 컨트리빵과 샌드위치 재료들을 삽시간에 품절시키는 현상도 주목할 만합니다. 어떻게 샀고, 자르고, 먹었는지 공유하고 자랑하고 싶은 고객의 욕망은 컬리의 매스티지 전략을 더욱 증폭시키고요.
판을 바꾸는 빵, 슬랩
타르틴 베이커리의 슬랩은 사워도우의 맛을 가졌으면서도 대중의 접근이 쉬운 맛입니다. 여기에 컬리는 한정판으로 애타게 하고요. 우런니는 ‘나도 저렇게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합니다. 슬랩은 코스트코와 이케아에 단련된 대중이 가성비와 취향에 맞게 자르고 조합해서 먹을 수 있는 장점도 있고요. 슬랩 하나를 잘 먹기 위해 빵, 치즈, 햄, 쨈을 기꺼이 같이 구매합니다. 사람들은 힘들게 사고, 자르고, 만든 자신의 노하우를 허심탄회하게 공유하기도 하고요.
‘매장에서 갓 구운 빵을 넓게 잘라내 손님들과 나누고 싶다’는 채드 로버트슨의 메시지는 이제 매장을 박차고 나간 듯합니다. 슬랩은 단순히 맛있는 빵이 아닙니다. 판을 바꾸는 빵입니다.
📌판을 바꾸는 슬랩 전략 요약
대중적인 접근이 쉬운 맛: 사워도우의 깊은 맛+치아바타의 부드러움
한정판 마케팅
디토 현상
가성비와 취향에 맞게 먹을 수 있는 빵
크로스셀링으로 매출 올리는 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