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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눈에 보는 핵심요약
- 불필요한 수고를 줄여주는 서비스와 상품이 인기다. 일상의 무게와 피로를 기술로 경감시키는 새로운 경제구조, 레이지 이코노미(Lazy Economy)는 시간을 가장 고귀한 자산으로 여기는 이들에겐 하나의 전략이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를 추구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현대인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고 불필요한 수고를 줄이며, 결정의 피로를 덜어주는 기술과 서비스를 통해 일상의 부담을 외주화하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 개념이 바로 ‘레이지 이코노미’다.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려는 생략의 기술이자 새롭게 진화한 효율의 미학이다.
수고를 생략해주는 경제
레이지 이코노미Lazy Economy는 일상에 스며든 수많은 ‘결정의 무게’와 ‘노동의 피로’를 기술로 경감시키는 새로운 경제구조다. 무언가를 고르고 움직이고 관리해야 하는 삶의 수고로움을 각기 다른 서비스가 분담하고 있다. 알고리즘 기반 추천은 선택의 부담을 대신하고, 온디맨드 플랫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지우며, 자동화 시스템은 사소한 관리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이는 단순히 편의성에 그치지 않고 시간을 가장 고귀한 자산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전략이 된다.
넷플릭스나 왓챠의 큐레이션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을 정밀하게 학습해 ‘무엇을 볼까’라는 고민 자체를 없애준다. 밀리의서재나 리디북스의 AI 추천 시스템은 독서를 ‘노력 없는 몰입’의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차량을 직접 소유하는 대신 쏘카나 그린카를 이용하는 소비자는 보험, 주차, 정비 등 차량 유지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이동의 자유만을 누린다. 이런 ‘결정의 생략’은 단지 시간을 아껴주는 것을 넘어 과잉된 의사 결정에 지친 현대인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결국 레이지 이코노미는 피로한 사회 속에서 생산성과 정서적 균형을 동시에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 본질적인 삶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태도인 셈이다.

덜어냄 속에서 완성되는 고급스러움
초기의 레이지 이코노미는 품질을 다소 희생하고 편의성에 초점을 맞췄다. 무인 편의점·로봇 카페·밀키트·AI 스타일링 서비스 등은 사람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는 효율성을 제공했지만, 디테일하고 고차원의 무언가를 원하는 이들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예컨대 무인 카페의 경우 주문은 간편하지만, 한 잔의 핸드 드립 커피가 선사하는 섬세한 풍미와 바리스타와의 짧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온기는 결코 대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결정의 생략을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라, 프리미엄 가치를 더한 경험으로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수고는 덜고 품격은 더하는’ 전략이다. 예컨대 테슬라는 ‘운전 생략’을 단순한 자율주행 기술로만 보지 않는다. 차량이 스스로 운전하는 동안 사용자는 휴식과 사색의 시간을 누리며 이동을 생산적인 순간으로 바꾼다. 애플워치는 단순한 건강 모니터링 기기를 넘어 사용자의 라이프 스타일과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개인 맞춤형 건강 코칭을 제공한다. ‘측정’을 넘어 ‘관리’와 ‘동기부여’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유통과 여행 업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점점 뚜렷해진다. 신세계백화점은 VIP 고객을 위해 1인당 6,000만 원이 넘는 초호화 맞춤형 남미 여행 상품을 기획했다. 단순히 일정을 대신 짜주는 수준을 넘어 현지에서의 프라이빗 투어와 와인 셀렉션, 고급 숙박과 쇼핑을 한데 엮어 ‘귀찮은 과정을 사치로 바꾸는’ 경험을 제공한다. 선택의 번거로움을 최소화하면서도 그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희소성과 세심한 취향 맞춤이 함께한다. 이는 결국 선택지를 줄이되, 남겨진 선택이 훨씬 깊고 풍부하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덜어냄 속에 완성되는 고급스러움. 프리미엄 레이지 이코노미는 시간과 에너지의 재배치를 통해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전과 다른 경험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품격을 설계하는 프리미엄 서비스
레이지 이코노미는 프리미엄 서비스산업의 핵심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특히 의료·헬스케어·고급 요식·프라이빗 교육 분야에서 그 영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AI 기반 건강 데이터 분석을 통해 맞춤형 영양제를 정기 배송해주거나 식단·운동·수면까지 관리하는 ‘헬스 매니지먼트 구독’ 서비스도 등장했다. 강남의 한 피부과는 연간 1,000만 원대의 구독 프로그램을 통해 ‘신경 쓰지 않아도 외모는 관리된다’는 경험을 제공한다. 도산대로의 메디컬 타워와 같은 메디컬 몰은 미용은 물론 건강검진, 정형외과, 정신 건강 클리닉까지 원스톱으로 연결해 실질적인 레이지 서비스를 구현 중이다.
고급 교육 시장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챗GPT 기반의 프라이빗 튜터링 서비스는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을 자동화하며 고소득층 부모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유치원 입학부터 영어, 미술 관람까지 자동으로 스케줄링하는 ‘가정형 교육 컨시어지’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라이프 스타일 매니지먼트 기업들은 골프장 예약, 고급 식당 픽업, 갤러리 프라이빗 뷰잉, 와인 경매 대행까지 포함한 구독형 서비스를 제공하며 품격 있는 삶을 설계하고 있다.

시니어 시장을 움직이는 레이지 전략
자산가에게 시간은 자산보다도 소중한 자원이다. 특히 연령대가 높을수록 체력이나 관심의 한계, 디지털 문해력의 벽을 넘어서는 ‘수고 생략형’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AI가 일정을 조율해주는 디지털 비서 앱, 자동 정산이 되는 고령 친화 금융 플랫폼, 지역별 간병인을 실시간으로 매칭하고 평가·정산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해주는 간병 서비스 등은 실버 세대를 위한 대표적 레이지 이코노미 사례다.
2003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개발하기 시작한 치매 방지용 로봇 실벗Silbot은 복약 시간과 식단을 체크해주며, 자녀가 없는 독거노인의 삶을 ‘지속 가능한 자율’로 바꿔놓는다. 서울대학교 병원은 AI 기반 치매 위험 분석과 맞춤형 건강 컨설팅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디지털 기술은 이제 고령자의 삶에서 번거로움을 배려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 프리미엄 실버 레지던스에서는 룸서비스·세탁·건강관리·외출 도우미 등이 포함된 통합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일부는 월 1,000만 원이 넘는 구독료를 받는다. 이는 단순한 돌봄이 아닌, ‘삶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프리미엄 레이지 이코노미의 집약체다.

삶의 여백을 설계하다
‘게으름’이란 단어는 대부분 나태함이나 귀찮음을 대신해왔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계획을 세우고, 분주하게 하루를 소비하며, 때론 자신을 채찍질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부지런함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한번쯤 괜찮은지 묻고, 돌아볼 필요는 있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위해 지금 지혜롭게 시간을 쓰고 있는지, 불필요한 곳에 쓰이는 에너지는 없는지 말이다.
레이지 이코노미는 자신에게 엄격한 이들한테 여백을 선사하는 데서 출발했다. 단순히 “대신 해드립니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지 마세요”, “이런 건 어때요?”라고 먼저 질문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백을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울 수 있다. 불필요한 결정에 에너지를 쏟는 시간대신 가족과의 시간을 챙기고, 반복적으로 하는 고민보다는 창조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의사 결정 과잉 시대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적 게으름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여 정서적 가치까지 제공한다.
프리미엄 소비도 이제 고가 제품의 소유가 아닌, 전략적 생략을 통해 ‘생산적인 여백’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의전 서비스, 전담 매니저, 골프장 전용 컨시어지, 기후와 수면을 분석한 여행 리포트까지 오늘날의 프리미엄은 ‘덜 움직이면서 더 누리는 삶’에 투자하고 있다.
글. 민병운(트렌드인사이트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