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광고대행사 AE(Aaccount Executive, 광고기획) 출신이다. 광고대행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수많은 밤을 회사에서 지샜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1월 1일의 일출도 사무실 창문을 통해 맞이했다. 대학 시절에는 입에도 안 댔던 커피를 줄창 마시며 졸음과 싸웠고 PT기획서를 쓰다가 아침 7시에 퇴근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알 수 없는 퇴근 시간 때문에 저녁에 약속 잡기도 곤란했다(그 시절 친구들 대다수가 떨어져나간 아픔이 있다). 52시간 근무가 제도화된 지금 되돌아보면 왜 그렇게 기계처럼 야근을 했어도 불만이 없었는지 신기했다. 밤늦게 귀가해서 힘들고 짜증은 부렸어도, 야근 자체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상 광고를 하려면 야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광고대행사는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가?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나는 기업의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나와 일하는 광고대행사는 야근을 한다. 일부러 야근을 시키지 않으려 해도 상황이 그렇게 된다. 일을 주는 입장과 일을 받는 입장을 둘 다 겪어본 사람으로서 광고대행사 야근의 원인을 정리해보았다.
2.
먼저 야근을 구분하면 돈을 받는 야근과 돈을 받지 않는 야근으로 나눌 수 있다(우리는 돈 받는 직장인이니까 이렇게 나누는 게 맞다). 전자는 연장근무 수당에 대한 노사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제도권의 보호 하에서 추가 근무를 하는 것이다. 주로 성수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일반 시급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일한다.
후자는 추가금액을 주는 연장근무가 아닌,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그 날 업무 또는 해당 프로젝트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잔업이다. 한마디로 낮의 일을 다 못 끝내서 밤에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광고대행사의 야근이다. 만약 모든 야근에 수당이 주어진다면 한국에 광고대행사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3.
프로젝트의 스케쥴링을 담당하는 AE 입장에서 야근은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최대한 피하려 해도 꼭 여러 가지 변수 때문에 야근을 해야 했다. 다음은 AE 시절 야근에 대해 고민하면서 써놨던 메모를 찾아서 정리한 내용이다. 광고대행사가 야근을 하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 여기서 개인의 능력 미달로 야근을 하는 경우는 제외한다.
① ASAP( As Soon As Possible)
흔히 아삽이라고 불리는. '되도록 빨리 주세요'라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은 광고대행사 입장에서 굉장히 힘빠지는 요청이다. 업무를 결정할 때는 시간(time), 비용(cost), 범위(scope), 이 세 가지를 협의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비즈니스 매너인데, ASAP는 이런 기본적인 매너가 결여된 요청이다.
- 되도록 빨리(time)
- 돈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빨리(cost)
- 빨리 주는 거 감안할 테니까 할 수 있을 만큼만(scope)
저녁 6시 반에 ASAP 요청이 오면 AE는 퇴근하려는 제작팀 CD부터 붙잡아야 한다. 다음날 회장 보고가 갑자기 잡혔으니 출근하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클라리언트의 요청을 전달하고 제작팀의 욕받이가 되어야 한다. 야근은 당연하다. 제작팀 붙잡아놓고 AE가 먼저 퇴근 할 수 있겠는가?
업무 스케쥴링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느냐?'이다. 광고기획을 담당하는 AE는 제작팀과 논의하여 투입되어야 할 시간, 비용, 범위를 결정하고 클라이언트와 협의하지만, 이런 ASAP 요청은 AE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어떤 클라이언트 담당자는 내부에서 나름 반항도 하고 에이전시에게 이런 말 못한다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대부분 내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AE님 정말 죄송해요. 내일 아침까지 제안서 전달 가능할까요?'라며 전화 너머로 울먹거리기 마련이다. 이런 ASAP는 대부분 계획없는 무근본 지시사항이고 보여주기식 업무라서 제안의 퀄리티도 떨어진다. 야근을 부르는 가장 큰 원인이다.
② 힘 없는 담당자
보통 AE와 접촉하는 클라이언트 측 담당자는 마케터나 브랜드 매니저다. 대기업일수록 이런 광고담당자의 권한은 중국집 철가방 수준이다. 한 마디로 메신저에 불과하다. 더러 역량있는 실무자는 본인의 스피커를 키워서 책임과 권한을 늘려가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팀장, 본부장, 사장을 꺾지 못한다. A라고 전달했던 제안이 되돌아 올 때는 A+be345로 변신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광고는 전문적인 분야지만 동시에 비전문적인 분야다. 분명 광고를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과정은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지만, 소비자에게 노출된다는 측면에서 누구나 소비자일 수 있기에 아무나 광고안의 수정사항을 말할 수 있다. 물론 광고안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하는 순간 배가 산으로 가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수정 한 번 해도 자기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담당자는 윗선에 올려서 하나하나 컨펌 받아야 한다. 이 부분이 다 시간낭비가 될 수 있다. 팀장님 결재 받는데 1시간 걸렸는데 그 사이 본부장에 사장, 그리고 골프치느라 바쁘신 회장님 보고까지 올라가기 위해 4일을 기다려야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나마 책임지기 싫은 사람은 그냥 윗선에 그대로 보고하는 반면, 이 광고에 반드시 본인의 의지를 넣겠다는 열정에 불타오르는 임원이 한 명이라도 결재라인 중간에 껴있는 순간, 또다시 되돌이표다. 온에어 날짜는 정해져있는데 그 사이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시간을 다 까먹어버리면 결국 클라이언트가 까먹은 시간만큼 야근해서 채워야 한다. AE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건 덤이다.
③ 야근할 힘이 남아돈다.
광고대행사의 방만한 운영체제도 한 몫 한다. 여기저기 인터넷도 뒤져보고 담배도 피고 잡담도 하다가 7시쯤 나가서 저녁 반주하고 여유는 있는 대로 다 부리다가 10시에 모여서 회의하는 꼴을 보고 기가 막힌 적이 있었다. 그리고 1시에 집에 간다. 다음날은 야근했다고 1시간 정도 늦게 온다. 혹자는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태도 자체가 안이한 건 문제다.
시간을 많이 들이면 뭔가 희생한 것 같고 집에 늦게 들어간만큼 내가 열정을 쏟아부은 것 같고, 장인정신을 발휘했다고 스스로 체면을 세우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행위를 많이 봤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이라고 헤서 보헤미안 같이 널널하게 일하고 야근한다고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는 통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미국만 해도 철저하게 타이트한 스케쥴 아래 정신없이 일하고 정시퇴근하는 회사가 널렸다. 만약 야근이 아이디어 도출에 있어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면 서양인들보다 더 일하는 우리는 벌써 칸 광고제를 제패하고도 남았어야 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9시간 미친듯이 집중하면 단언컨데 야근할 힘조차 들지 않는다. 지쳐서 집으로 가고 싶겠지.
④ 우리 더 고민해볼까?
광고라는 게 사실 정답이 없다. 최대한 정답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문제를 인식하고 기획을 하고 크리에이티브를 내는 것이지만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는 판단을 해야 할텐데 문제는 돈을 주는 클라이언트에게 최종 판단권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고대행사 안에서는 설사 대표라고 해도 정답이 될 수 없다. 광고를 사는 고객 입장에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니까.
따라서 결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룬다. 마치 시험기간에 슬슬 공부하다가 전날밤에 벼락치기 하는 학생처럼 제안 전날에 풀야근을 한다. 이런 행위는 '우린 이만큼 고민하다가 마지막에 결정했으니 정답에 가까울 거야.'라는 자기위로에 가깝다. 이렇게 결정을 뒤로 미루다보면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야근하게 된다. 집에 가고 싶어도 큰일 보고 뒷처리 안한것처럼 찝찝해서 밤새며 회의를 하게 된다.
이렇게 대책없을 때는 그냥 집에 보내는 게 상책이다. 한숨 자고 다시 보면 의외로 다른 생각이 들수도 있으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밤늦은 지금도 결정을 미루는 디렉터 때문에 회의실 안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실무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⑤ 가족문화/군대문화
식구, 가족이라는 말은 회사에서도 종종 쓰인다. 팀장이 팀원들보고 내 새끼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흔하다. 업무 시간 끝나고 나서는 형동생이라며 술 먹고 어깨동무를 한다. 친화력을 강화하는 측면에서는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근로계약관계를 가족주의/군대문화로 변형하여 희생을 당연시 여기고 강요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퇴근시간이 상사의 퇴근시간보다 일찍이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다. 오늘 안에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상사가 외부일정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결재를 받기 위해 야근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내 일 다 끝났고 집에 가도 아무 상관없는데 상사가 퇴근하지 않아서 눈치보여 퇴근 못하는 경우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씩 겪어보거나 들어봤을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내 일 끝나면 가는 게 맞다. 하지만 가족주의라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나이 많은 어른, 혹은 형님이 퇴근하지 않았는데 어딜 감히...'라는 꼰대꼰대한 사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사를 때리고 싶다가도 상사는 때리면 안된다는 강렬한 두 욕망이 대립한다. 이게 다 야근 때문이다(출처: 무한도전)
혹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도 한 몫 한다. AE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지만, 프로젝트 안에서 역할은 제작팀과 나누어져있다. AE는 기획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제작팀은 제작 관련 업무를 처리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의 프로젝트기 때문에 연관성이 짙다. 만약 제작안 리뷰에서 깨진 제작팀이 저녁에 모여서 끙끙대고 있는데 회의실 문 빼꼼 열고 퇴근 인사를 하면 CD가 소리칠 것이다. '당신은 책임감도 없냐? 당신이 기획한 데로 제작안 만들었다가 리뷰 통과 못했는데 먼저 가고 싶은 거냐?' 물론 이런 얘기 안하고 쿨하게 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리할 때는 '함께', 유리할 때는 '따로' 움직이려 하는 경향 역시 야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4.
52시간 제도가 시행되면서 야근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사실 기업 전체적으로 야근을 지양하는 인식을 가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현상일테지만 이렇게 제도를 통해 억지로라도 바뀔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주 6일제 근무에서 5일제로 바뀔 때도 나라가 망한다느니 경제가 몰락할거라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결국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
열심히 한다고 하면 열심히가 아니라 잘 해야 한다고 핀잔을 받는 시대다. 그만큼 업무의 질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자기위로를 위해 또는 보여주기 위해 야근을 하는건 자신 뿐만 아니라 동료에게도, 회사에게도 모두 손해다. 본인의 일처리가 마음에 안들어서 야근을 자발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시간 안에 끝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52시간 제도가 시행되었어도 야근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무능한 팀장일 수록 팀원들의 저녁 식비 영수증을 많이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야근은 프로젝트 매니저의 무능이자 팀원의 실책이라는 인식이 정착되어야 단절될 수 있다. 불합리한 야근이 줄어들수록 팍팍한 이 세상에서 일할 맛이 조금이라도 더 나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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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