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넛지
넛지(Nudge)란 '행동경제학' 분야에서 파생된 용어로 '어떤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며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것'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다. 넛지의 기본 토대는 윤리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 넛지를 활용한 기획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선한 쪽으로 유도하자는 것이다. 이를 ‘선택설계’라고도 부른다. 아래는 관련 도서 '넛지'에서 정의한 세 가지 원칙이다.
[넛지 사용의 세 가지 원칙]
• 모든 넛지는 투명해야 하고, 절대로 상대방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 넛지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한다. 마우스 클릭 한 번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 넛지를 통해 유도된 행동이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든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가장 유명한 넛지 사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소변기이다. 이 소변기의 중앙에는 파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파리를 보고 소변을 볼 때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 양이 80% 정도 줄었다고 한다. 실생활에서는 에어컨 필터 교체 시기를 적색으로 알리는 사례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들을 대비해 쓴맛이 나는 매니큐어도 넛지 사례로 볼 수 있다.
시각적 트릭을 활용한 넛지도 존재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례 중 하나다. 미국 시카고의 레이크쇼어 드라이브 구간에는 곡선 구간이 많아 사고가 매우 잦았다고 한다. 2006년 시카고 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커브 구간에 진입하기 전부터 도로에 가로 선을 그었다. 커브 구간에 가까워질수록 가로 선의 간격을 매우 좁게 디자인했다. 운전자들은 커브를 돌 때 속도가 높아진다고 착각했고 이후 도로의 사고가 36% 감소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세상 대부분은 넛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넛지는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되려 언제나 똑똑한 판단을 하며, 이기적인 인간을 상정하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넛지는 인간이 종종(꽤 자주) 감정적 선택을 하며 오류를 저지르게끔 설계되어있다고 한다. 행동 경제학자들은 오류 투성이 인간을 넛지를 활용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이끌자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행동경제학을 옹호하는 입장이라 이런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가끔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낮게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인간이 집중해서 넛지를 보면 많은 부분 독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하루 24시간 모든 사항에 집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한계를 인식하고 넛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부분이 있다. 인간이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는 오토파일럿 모드(무의식으로 행동할 때) 일 때 넛지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듯하다.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
'기준점 효과'는 넛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심리적 현상이다.(닻 내림 효과라고도 한다.) 사람은 최초의 무언가와 마주했을 때 그것에 대한 정보가 적어 똑똑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장 먼저 제시된 지점(Anchor)에서부터 판단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준점은 곧 한계점이 되며, 판단에 대해 왜곡이나 편파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가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기준점 사례는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다. 할인 상품 옆에 원가를 적은 뒤 원가에 줄을 그어두면 대부분의 소비자는 원가를 기준점으로 생각한다. 간단한 트릭이지만 이 방식이 소비에 거짓 합리성을 부여하게 된다. 즉, '나는 현명한 소비를 했다'와 같은 생각이다. 학창 시절 평균 90점을 유지하던 반 친구가 85점이 되자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신 선생님 얼굴도 기억난다. 반대로 평균이 65점이던 학생이 평균 80점이 되자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을 하셨고, 그 친구는 이내 무혐의로 풀려났다.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이다.
기준점 효과의 대가는 역시 애플이다. 2007년 처음 아이폰이 출시됐을 때 가격은 599달러였지만, 몇 달만에 애플은 399달러로 가격을 인하했다. 이는 폭발적인 판매 증가를 이루었다. 이러한 가격 설정은 애플의 열성팬들이 아닌 구매를 서성이던 일반 소비자를 위한 마케팅 방식이었다. 이 이면에는 '200달러를 이득 봤다'라는 일반 소비자의 최초 가격에 대한 기준점 효과가 설정되어있다. 기준점 효과를 활용한 대중적 UX로는 아래 같이 가장 비싼 옵션과 실제로 판매하고자 하는 옵션을 함께 배치하는 가격 책정 서비스가 있다. 사용자의 시선 이동을 고려해 가장 비싼 옵션을 좌측에 배치한다. 사용자 기준점이 가장 비싼 가격에 맞춰지게 하는 것이다. 추가로 원근법을 활용한다면 가장 비싼 옵션과의 시각적 차이를 확실히 느끼게 할 수 있다. Premium과 Basic은 사실상 사용자로부터 Standard를 선택하게끔 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기준점 효과는 디지털 프로덕트를 설계하는 UX 디자이너가 하는 일과 닮아있다. 내 경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기본값(Default)을 어떻게 하면 더 매끈하게 디자인할 수 있을까에 할애한다. 대부분의 사용자는 기본값을 바꾸는 것에 극도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다크 넛지란?
넛지가 인간의 윤리적 선택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고는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다. 기업은 이익집단 이기 때문에 넛지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매출을 높인다 해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단 매우 악의적인 넛지는 제외다. 이러한 넛지의 악의적 활용을 어둠을 뜻하는 'Dark'와 결합해 '다크 넛지'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다크 넛지가 주로 문제시됐던 분야는 음원사이트였던걸로 기억한다. 할인행사 후 이용권이 자동결제로 넘어가는 부분을 기업이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회원가입은 모바일로 가능하지만 탈퇴는 무조건 PC를 이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저렴한 특가 항공권 배너를 클릭 후 자세한 일정을 설정했는데 가격이 확 뛰는 경우도 다크 넛지에 속한다. 에어비앤비 역시 처음 숙박 가격과 각종 수수료/봉사비가 붙은 최종 가격의 큰 차이로 비난받는 기업 중 하나다. 소비자는 자기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 때문에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결제를 하게 된다. 다크 넛지는 소비자의 귀차니즘을 노린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무수히 많은 다크 넛지를 기업의 이익을 위해 디자인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내 디자인이 사회적으로 어떤 작용을 할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로지 시각적 완성도에만 골몰해있었다. 과거로 돌아가도 딱히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은 적을 것 같지만 내 디자인의 사회적 작용에 관해서는 한 번쯤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한 윤리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무언가를 디자인할 때 '인식하고'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크 넛지의 다양한 패턴
생산성 프로덕트 Confetti의 Co-Founder 대니 사피오는 자신의 미디엄에 다크 넛지의 UX패턴에 관한 글을 실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글을 재밌게 읽었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개인적 의견을 더해 간단히 소개할까 한다. 아래에 전문 링크 남겼고,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만 인용해보겠다.
Bait and Switch
대니 사피오는 첫 번째 다크 넛지 패턴으로 무료처럼 보이는 버튼과 시각적 위계상 낮게 설정된 과금 정책을 예로든다. 유저는 시각적 위계(Visual Hierarchy)에 속아 무의식적으로 버튼을 클릭한다.
Misdirection
이 역시 시각적 위계 차이를 극심히 둬 시선을 버튼에 집중시키는 패턴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시각적 강도 때문에 읽어야 할 정보를 무심히 지나치게 된다.
Hidden Costs
앞서 예로 든 에어비앤비 사례와 유사하다. 최초 가격과 많은 차이가 나는 최종 요금에 대한 다크 넛지 패턴이다.
Trick Question
서비스를 탈퇴하고 싶을 때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사용자는 이러한 문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단순한 질문처럼 느껴 클릭하지 않게 된다.
FOMO(Fear of Missing Out)
물건의 수요가 높아 곧 있으면 사라지는 뉘앙스를 주는 패턴이다. 결과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사용자의 결정 시점을 빠르게 앞당기는 힘이 있다.
윤리적 UX의 발전 가능성
처음 다크 넛지에 관한 글을 읽었을 때 당장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생존이 걸려있는데 UX와 윤리의 연결은 자칫 사치스러운 것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윤리적 UX에 관한 언급은 아직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너무나 치열한 경쟁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발행된 각종 2020년도 트렌드 리포트에는 '윤리적 소비자'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한다. 유니클로 파동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는 기업의 제품은 구매하지 않는 소비자가 등장했고, 자신이 직접 관람하지 않더라도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인디 영화 표를 다수 구매해 자신의 SNS 계정에 업로드하는 소비자도 등장했다. 환경이나 젠더 이슈에 관한 문제도 빠트릴 수 없다. 한때 친구들 사이에서는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는 것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관련 리포트들에서는 한국 소비자들이 사상에 맞게 물건을 ‘가치소비'하기 시작한 시대로 진입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상품을 소비재 이상으로 바라보며 브랜드 철학에도 관심을 가진다. 이는 전통적인 마케팅에서 활용되던 인구통계학(Demography)에 기댄 페르소나를 활용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힙합 음악과 스키니진을 잘 소화하는 중년들을 우리는 매체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소비자를 예비할 필요가 생겼고 그 중심에는 '윤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니 사피오는 다크 넛지에 관한 글 이후 윤리적 UX에 관한 글도 연재한 바 있다. 기업이 다크 넛지를 활용한 단기 이익을 포기하고 사용자의 이익을 취우선으로 했을 때 취할 수 있는 무형적 자산에 관한 글이다. 이 무형적 자산은 바로 '신뢰성'이다. 대니 사피오의 글에서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해 글을 마무리하겠다. 모두 인용하지는 않았으며 그의 전문이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Notify Me
윤리적 UX의 첫 번째 예시다. 사용자가 무료 체험판을 등록했다가 깜빡해 가입비를 지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보를 계속해서 알려주는 형태다. 윤리적 UX에서는 다크넛지와는 반대로 '유저 입장'에서의 부정적인 정보를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Highlight negative information
사용자가 내릴 결정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해 보여주는 UX 패턴이다. 대니 사피오는 에어비앤비 예시를 든다. 아래 예시에는 내가 예약하고 있는 장소에 일산화탄소 검출기가 없고, 파티도 열 수 없다고 강조한다. 마음먹으면 이런 정보는 쉽게 숨길 수 있지만 UX에서 드러냄으로써 유저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Default to the option that's safest for the user
어떤 양식의 기준을 사용자를 대신해 미리 결정하지 않는 패턴을 말한다. 예컨대 다크 넛지의 경우 아래처럼 뉴스레터 가입 양식에 ON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윤리적 UX패턴에서는 이러한 결정 권한을 사용자에게 넘긴다.
Experience over revenue
많이 공감했던 부분 중 하나이다. Lyft는 Uber와 유사한 사업 모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Public transit이라는 대중교통을 위한 기능이 추가되었다. 이는 기업의 수익에(택시) 반하는 기능이다. 대니 사피오는 Lyft의 이런 선택이 단기 수익보다 사용자 경험을 중심에 둔 결정이 아닐까 추측한다.
Price transparency
가격 투명성에 대한 UX패턴이다. 내가 구매하는 최종 금액(각종 부가세)을 처음부터 보여줌으로써 사용자의 신뢰를 획득하는 패턴이다.
Make it easy as pie to cancel
가입은 쉬운데 탈퇴가 어려운 프로덕트가 많다.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야 할 경우도 있다. 아래 UX패턴은 버튼 하나로 구독을 쉽게 해제할 수 있다.
- http://blog.bizspring.co.kr/29144
- https://www.mobilespoon.net/2019/04/collection-cognitive-biases-how-to-us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