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을 넘어선 독창적 가치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이던 월터 바조트Walter Bagehot는 “눈앞에 있는 것을 모방하려는 것은 인성의 가장 강한 부분 중 하나”라고 했다. 인간의 본성 중에는 누구나 따라 해보고 싶은 심리, 즉 ‘모방’이라는 본능이 있다.
기업의 경우에도 모방을 적용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모방으로 성공한 기업은 단순히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남다른 방식으로 개선해 독창적 가치를 창조해낸다. 모방 경영이 성공 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다.
미래의 혁신, 따라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방’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부정적 뉘앙스 탓일까? 현실에서는 모방 경영이라는 말보다 벤치마킹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용어가 무엇이건 많은 조직이 다른 조직의 경영 방식을 참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공한 사례를 참고하는 가장 기본 이유는 그것이 검증된 지름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제점이 검증되었고, 그것이 시장으로부터 인정까지 받았다면 그 방식을 따르는 것이 시간과 비용은 물론 위험까지 줄이는 첩경이 된다. 또 벤치마킹은 내부 중심 시각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성공 체험이 있는 조직일수록 과거와 내부 관점에 얽매어 새로운 환경 변화를 읽지 못하고, 어느덧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타인을 살펴 볼 수 있다면 변화의 방향과 새로운 기회 및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조직의 사례를 연구하고 배울 점을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확인할 수도 있다.
경쟁이 지배하는 기업 환경에서 모든 성과는 그야말로 상대적이다. 우리의 눈높이가 곧 시장과 고객의 눈높이는 아니다. 지혜로운 기업은 끊임없이 경쟁사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들의 눈높이를 수정하고, 그러한 관행이 널리 자리 잡은 산업일수록 산업 전체의 수준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성공 기업의 경영에도 모방이 숨어 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선도 기업들의 경영 속에도 모방이 숨어 있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혁신과 모방이 대척점에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남들에게서 적극적으로 배움으로써 혁신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선도기업의 경영 속에 숨어 있는 모방을 찾아보자.
전 세계의 많은 항공사가 사우스웨스트 항공사만이 가진 전략을 모방해 추진하지만 성과는 그다지 높지 않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저가 항공의 개념을 바꾼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항공Southwest Airlines을 들 수 있다. 이 회사의 전략 방향과 목표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저렴하면서 수익성이 높은 항공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비싼 자산인 항공기가 경쟁사에 비해 짧게 공항에 머물고 더 많은 시간을 운항해야 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못한 이 혁신을 이루어내기 위해 이 회사의 CEO인 허브 켈러허Herb Kelleher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동종 업계가 아닌 자동차경주 현장을 선택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은 직접 자동차경주 현장을 찾아 트랙을 벗어난 경주용 자동차를 단 몇 초 만에 완벽히 정비하고 다시 경주장으로 투입하는 등 이들의 노하우와 관련한 모든 것을 꼼꼼히 모방하고 소화해 공항 체류시간을 최소화하는 자신들만의 혁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다른 회사가 따라할 수 없는 노하우로 자리 잡았다.
독일 산업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라디오.
애플은 그의 제품을 참고해 아이폰을 만들어냈다.
혁신적 제품의 상징인 애플의 디자인 속에도 모방이 숨어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이미 “우리는 언제나 부끄럼 없이 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라는 말을한 바 있다. 그중에서도 독일 출신의 전설적 산업디자이너인 디터 람스Dieter Rams의 디자인을 많이 참고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Less but better’라는 디터 람스의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 철학은 아이폰과 아이패드 디자인의 초석이 되었고, 애플 제품을 한 차원 다른 제품으로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모방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혜와 고민
모방 경영의 이점과 모방을 통해 혁신을 이뤄낸 사례를 살펴봤다. 모방 경영을 하는 모든 조직이 성공하는것이 아님은 우리는 알고 있다. 모방에도 나름의 요령과 지혜, 그리고 고민이 필요하다.
먼저 무엇을 모방해야 하는지, 즉 무엇이 우리가 배워야 할 알맹이인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모방의 상대와 나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없이 그저 겉모습만을 따라 하는 것으로 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전 세계 모든 매장에서 통일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무인양품無印良品은 2,000여 페이지로 구성된 업무 매뉴얼인 ‘무지그램Mujigram’을 운영하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기업이 무지그램을 모방했지만, 그것만으로 서비스의 통일성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무인양품에 무지그램을 도입한 주인공인 마쓰이 다다미쓰松井忠三 전사장의 말처럼 통일된 서비스의 핵심은 무지그램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지그램을 실제 운영 시스템에 정착시키기 위한 5년간의 지속적인 노력과 수십 년간의 업데이트가 성공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은 물리적 책자인 ‘무지그램’을 베낀 매뉴얼만 만들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제대로 된 모방을 막았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모방할지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모방에 성공할 수 있다.
따라가는 조직은 모방의 대상이 되는 앞서가는 조직보다 훨씬 더 부지런하고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많은 발명으로 유명한 에디슨은 사실 모방의 대가였다. 대표적 발명품인 탄소 필라멘트를 활용한 전구도 사실은 타인이 이미 발명한 것이었다.
다만 에디슨은 실험실에 머물던 남들의 아이디어를 끈질긴 실험과 노력을 통해 사업화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바꾸었고, 그것을 통해 역사에 남은 것이다. “1%의 영감과 99%의 땀”이라는 에디슨의 유명한 말은 모방을 통해 얻은 1%의 영감을 99%의 노력으로 현실화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모방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리지널보다 훨씬 더 부지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해 혁신에서 끝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방하는 사람과 혁신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혁신의 씨앗이 모방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처음으로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것을 마지막에 혁신으로 완성했느냐이다.
베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노력, 바로 거기에서 혁신은 시작된다.
글. 강승훈(LG경제연구원 연구원) | 사진. 한경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