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되면 기대되는 일이 점점 사라진다. 그래도 몇 안 되는 기대되는 일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소개팅이다. 이것도 사회 초년생 때 이야기다. 지금은 그마저도 기대되지 않는다. 주선자에게 배신 몇 번 당하면 이렇게 된다. 시간도 돈도 희망도 사라지는 경험이다. 대부분의 주선자는 상대방을 괜찮다고 말한다. 물론 진짜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와 다를 확률도 꽤 크다.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 인터넷에 '소개팅 언어 해석'이라는 짤로도 돌아다닌다. 주선자가 말했던 소개와 숨긴 실체를 매칭 시켰다. '진짜 착해=얼굴은 못생겼다, 진짜 진국이야=밤이고 낮이고 술 마시자고 하면 절대 안 뺌, 왜 여친이 없는지 모르겠어=니가 곧 알게 됨' 등이다. 이런 주선자는 솔직하지 않다. 힙합이 아니다.
출처: 네이버
배신은 주선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도 한다. 입사를 하고 나서 얼마 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 충격은 출근 시간부터 시작됐다. 통지받은 출근 시각은 9시였다. 나는 보통 회사에 58, 59분에 도착하곤 했다. 많은 MZ세대 글에 나와 있듯 이 시간에 출근하면 팀장님으로부터 피드백이 온다. 최소한 50분까지는 출근해 업무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피드백을 받고 나서 50분에 오기 시작했다. 도착 이후 커피를 사러 다녀오면 9시 2분쯤 됐다. 그 이후에는 또 다른 피드백이 돌아왔다. 9시 전에는 자리에 앉아 9시 땡 하면 근무를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9시 출근의 의미는 계속 다르게 읽혔다.
9 to 6. 직장인은 이를 해석해야 했다. 9시부터 6시까지 자리에 앉아 있음을 뜻했다. 그러면 퇴근 준비도 10분 전에 마치고 6시 땡 하면 퇴근해도 되는 것일까? 알려져 있듯 그렇지 않다. 더 이상한 점도 있었다. 커피를 사서 9시 2분부터 근무하는 나는 행동 통제 및 교정을 받았지만 9시 15분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 커피까지 마시고 들어와 9시 45분부터 근무를 하는 이는 한소리를 듣지 않았다. 도대체 9 to 6 해석은 어떻게 하는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입사할 때 출근시간 10분 전에 출근해서 준비를 하고 정각에 업무를 시작하고 담배도 피우러 가지 말라고 단체로 공지를 해줬으면 좋겠다.
9시 출근하라는 말이 정말 9시까지 오라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꽤 충격적이었다. 정해진 룰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룰을 어긴 사람이 된 것이다. 결국 조직장(임원 혹은 팀장) 마음이다. 이들의 가치관에 따라 만들어진 또 다른 이면의 룰을 알아차려야 하는 곳이 회사였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성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게다가 이런 눈치게임이 회사에서 하루 종일 이어진다는 점이 나를 더 괴롭고 고통스럽게 했다.
퇴근 시간에 눈치싸움은 정점을 찍는다. 6시 땡 하면 게임이 시작된다. 바람직한 퇴근 시간에 대한 해석은 조직별로 다르다. 상사가 퇴근해야 퇴근하는 직장이 있고 막내가 먼저 퇴근하는 직장이 있다. 분위기 해석이 중요하다. 대부분은 임원 혹은 팀장이 먼저 퇴근하고 팀원들이 퇴근한다. 물론 이렇게 하라고 규정으로 정해놓지는 않았다. 도저히 예측할 수 없고 물어볼 수도 없는 다른 사람의 퇴근이 왜 내 퇴근 시간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결국 6시 퇴근은 6시 이후 임원 혹은 팀장이 퇴근을 한 뒤부터 퇴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모든 눈치 게임 현장에서 더 미칠 노릇은 직접적으로 욕을 먹기보다는 안 좋은 인식으로 박히는 것이다. 이 또한 솔직함과 거리가 멀다. 상사들은 겉으로만 웃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몰래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경력직 면접을 봤을 때 퇴근 시간이 보통 언제였는지, 야근에 부담을 갖는지 질문을 받았다. 다소 밀레니얼스러워 보이는 인상을 우려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런 질문을 하는 상사는 실제로 입사했을 때 야근을 하는 직원을 더 훌륭한 직원으로 봤다. 답답할 노릇이다.
9시는 9시가 아니고 6시는 6시가 아니다. 회사에서는 이렇게 출근부터 퇴근까지 종일 눈치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말할 수도 없다. 이유는 그것이 규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사 마음속에 있는 법이기 때문일 테다. 마음속에만 있는 이유는 글로 나와있지 않은 것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본인의 기준에 맞추라고 말하기 무안하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 못할 것을 지키라고 눈치 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이다.
옳다고 하더라도 비효율적이라고 되받아치고 싶다. 솔직하지 못한 것. 이는 직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빙 돌아가는 것처럼 비효율적이다. 그렇게 돌아갔음에도 효과가 없다. 진짜 원하는 것, 해야 하는 것을 제대로 해석을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을 원하는 사람과 해석을 해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불만족과 갈등만 남길뿐이다. 누구도 정답이 될 수 있는 것을 누구도 정답을 못 맞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들이 회사에 도처에 널려있다.
힙합에서는 솔직함이 미덕이다. 힙합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투명하다. 많은 래퍼들은 돈을 원한다고, 성공하고 싶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싫은 건 싫다고, 좋은 건 좋다고 말한다. 날것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성공하고 치유하고 행복해한다. 나는 이것의 이유를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니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또렷하게 전달된다. 이 분명한 욕구들이 성공과 치유로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솔직함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돌아왔다.
회사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이 공기(air)와 같다. 그래서 부정적인 에너지가 그 공기를 장악하고 있다. 솔직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내가 솔직함이 멸종된 회사에서 지내는 것은 고역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의중을 알아내느라 낭비하는 시간, 마음고생은 비효율이고 회사를 떠나고 싶게 하는 이유다. 해석할 시간에 일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회사는 일을 하러 온 곳임이 자꾸만 잊혀진다. 솔직하게 커뮤니케이션한다면 업무도, 생활도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지금의 회사는 힙합이 아니다.
“저는 랩과 돈을 좋아하는 30대 아저씨입니다.”
- 염따 <돈 Call Me>
"저열한 이곳 처음엔 랩만 잘하라 더니
이젠 귀에도 눈깔들이 달려있대 잘 생겨야 들린대
꾸미래서 꾸몄더니 힙합 아니고 아이돌이냬"
- 쿤디판다, 저스디스 <뿌리>
우린 열심히 살았어 이건 아니야 기적
젠장 맨날 이 꽉 깨물고 살았고
백날 천날 언제 끝나나 싶었고
맨손 맨발로 여기까지 이뤘고
힙합 힙합 이게 내 인생 살렸고
삶을 구해 내 음악
올라왔지 금방
- UNEDUCATED KID , 호미들 , LIL GIMCHI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