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의 영감노트

카피라이터가 낭만적이라는 오해

브루스

2024.11.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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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마케팅 일을 하며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같은 AE(Account Executive)부터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그리고 영상 PD까지. 각기 다른 직무의 세계를 엿보는 재미는 직장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나만의 은밀한 동경의 대상이 있었다. 바로 카피라이터다.

 

내가 기억하는 카피라이터들은 늘 연필과 이면지를 들고 개성 넘치는 스타일링을 한 사람들이었다. 내 머리로는 절대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멋진 문장을 단 며칠 만에 만들어내는 그들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때로는 광고 업계의 치열함 속에서 홀로 고요함을 즐기는 시인 같았고, 때로는 라임으로 세상에 외치는 래퍼 같았다.

 

문장을 다루는 직업이라 그런지, 카피라이터들은 감수성과 창의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모니터 속 예산과 수치로 가득 찬 화면을 보며 일하다가, 우아하게 연필로 카피를 쓰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세상에서 낭만을 추구하는 시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카피라이터'라는 단어를 들으면 알 수 없는 동경심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오하림님의 책《카피라이터의 일》을 읽고 나서야, 내가 품고 있던 카피라이터에 대한 낭만은 큰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29CM의 카피라이터 헤드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카피라이터를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많은 직업”이라고 정의한다.

 

책에 따르면, 좋은 카피는 쓰는 것이 아니라 지우고 압축하면서 완성된다. 카피라이터는 꿈처럼 이상적인 문장보다는 현실에 뿌리내린 글을 써야 하고, 무엇보다 카피가 사용될 공간에 어울리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TV 광고에서는 브랜드의 가치를 소개하는 한 줄이 될 수도 있지만, 광고 배너나 제품 상세페이지에서는 소비자를 바로 구매로 이끄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카피라이터가 ‘누구나 쓸 수 있는 언어를 더욱 세밀하게 다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유튜브 댓글을 읽고, 시장거리의 대화를 엿듣고, 때로는 본인이 경험하지 못한 제품을 알기 위해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 소비자 언어를 찾기 위한 분투가 그들의 일상이었다. 누구나 한마디씩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장이라도, 완벽한 카피를 만들기 위해선 셀 수 없이 많은 고민과 수정이 뒤따른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책의 3장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서 저자가 전하는 태도는 내게 큰 공감을 줬다. 나와 비슷한 연차의 직장인인 저자는 “회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이라거나 “11년 차가 되니 일이 무엇인지 더 모르겠다”라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전한다. “전쟁 같은 회사 속에서 나를 지키는 일은 스스로 힘을 주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복해 읽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우아한 백조도 물 아래에서는 힘차게 발길질을 한다는 말처럼, 누군가의 멋진 모습 뒤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 있다. 단숨에 끝낸 것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거쳐 이뤄낸 성취일 것이다. 카피라이터든 AE든, 우리 모두 자신만의 영역에서 매일 분투하며 또 하루를 이겨내고 있다.

 

카피라이터는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답이 없음을 인정하며, 수많은 카피를 지우고, 발로 뛰며 한 문장과 한 글자를 위해 수십 시간을 쏟는 그들은 낭만적이다. 어쩌면 홍보·마케팅 직군에 일하는 사람들의 낭만은 답을 모르는 일에 매일 뛰어들어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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