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2021년 개봉한 영화 <미나리>를 아시나요?
아메리칸드림을 꿈꾼 한인 이민 가정사를 그린 영화죠.
순자가 한국에서 가져와 개울가에 심은 미나리는 한인 이민자들을 은유합니다.
척박하고 낯선 땅에서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는
모든 것을 잃은 제이콥 가족의 희망이 되어 주죠.
<사진 출처: 판씨네마>
영화 <미나리>에 힘입어, 미나리 매출은 이전 해 같은 기간보다 155% 급증했습니다.
당시에는 영화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그로부터 4년 후,
F&B 씬에 미나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능동 미나리, 남주를 갈아치우다?
능동미나리는 <미슐랭 가이드 서울2025>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신용산역에서 성수, 여의도까지 지점을 확장하며 핫플을 넘어 시스템과 구조화에 힘쓰고 있죠.
능동미나리의 메인 메뉴는 초록색 미나리가 수북하게 쌓인 곰탕입니다.
당일 도축한 신선한 한우와 깨끗한 지하수로 키운 미나리를 사용해 담백하고 잡내가 없어요.
맑고 깔끔한 고깃 국물과 미나리의 알싸한 맛이 어우러진 최고의 조합이죠.
어라?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미나리의 상대역은 원래 삼겹살 아니었나요?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뜨끈한 소고깃국과 향긋한 향신채소의 조합, 이거 어디서 많이 봤다 싶어요.
바로 베트남 쌀국수입니다.
고수가 19금이라면, 미나리는 15세 이용가
세련되고 담백한 소고깃국물,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쌀 면발, 베트남 쌀국수 퍼보는 우리 나라에 1990년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2003년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 ‘호아빈’이 생긴 이후 2011년 기준으로 국내에 쌀국수 브랜드로만 17개, 320개 정도의 점포가 운영됐습니다.
2025년 현재, 정확한 최신 통계는 확인이 어렵지만, 개인 매장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쌀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쌀국수의 호불호는 ‘고수’에서 갈립니다.
고수의 강한 데카날 성분 때문에 ‘비누 맛’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미나리는 향이 있으면서도 훨씬 부드럽고 상쾌합니다.
쌀국수는 좋아하지만 고수는 넘기 힘든 벽이었던 이들에게 미나리는 딱 적당한 타협점이 되어줍니다.
고수가 으른의 맛 19금이라면, 미나리는 꽤 친숙한 15세 이용가인 셈이죠.
리메이크한 김에, 19금 이용가를 15세 정도로 조정하고, 더 맛깔나게 살렸어요.
곰탕 가득 쫑쫑 썬 미나리는 당일 잡은 한우가 입으로 잘 들어갈 수 있게 그린 카펫이 되어 주고요.
능동미나리는 쌀국수의 소고기육수는 한국의 곰탕으로, 고수는 미나리로 리메이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겹살-미나리’라는 클리셰도 멋지게 부숴버립니다.
느끼한 맛 비릿한 맛 상큼하고 개운하게 잡아주마
미나리는 소고기,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오징어나 쭈꾸미 같은 해산물과도 정말 잘 어울려요.
그뿐인가요. 미나리 비빔밥, 미나리 육회처럼 생채소 느낌을 살려 생으로도 먹고요.
살짝 아삭함이 살아있을 만큼만 데쳐서 무쳐도 맛있고, 지글지글 전으로 부쳐도 맛있습니다.
해독 작용도 뛰어나다고 하니, 봄철 보양식이 따로 없죠.

왠지 미나리는 오랜 조연 생활을 딛고 주연으로 발탁된 여배우 같아요.
상대방의 연기를 잘 받쳐주면서, 자기 매력을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잖아요.
느끼한 맛, 비릿한 맛 무엇이든 미나리만 있다면 여배우 잘 섭외한 영화 한 편 본 것처럼 유쾌해 집니다.
미나리는 장르다!
미나리와 야쿠르트는 봄 제철 웹드라마
고기나 해산물 조합으로만 미나리를 먹었다면, 최근 한국야쿠르트가 개발한 미나리 야쿠르트를 소개해 드릴게요.
GS편의점 신상으로, MZ세대들 사이에서 슬슬 입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앱으로 재고 조회 후 방문하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요.
아니, 미나리가 뭐라고 이렇게 인기일까요?
최근 계절감이 많이 사라지면서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제철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고 있거든요.
음식 뿐만 아니라 ‘봄 제철 드라마’, ‘여름 제철 영화’ 처럼 콘텐츠도 제철에 따라 소비하고 있답니다.
미나리 야쿠르트도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트렌드를 따라 우리 곁에 왔습니다.
이 봄에 즐기면 딱 좋은 미나리 야쿠르트 주연의 웹드라마랄까요?
돌미나리 리코타 젤라또는 달달한 로코

미나리는 예명도 많아
논미나리/밭미나리

미나리는 어디서 기르느냐에 따라 논미나리와 밭미나리로 나뉩니다.
논에서 기르면 논미나리, 밭에서 기르면 밭미나리죠.
그러니까 영화 <미나리>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건 밭미나리가 됩니다.
밭미나리는 돌에서 자랐다 해서 돌미나리, 논미나리는 물에서 자랐다해서 물미나리라고도 불립니다.
밭에서 물을 줘 키우는 밭 미나리는 길이가 짧고 속이 꽉 차 있어요.
반면 물을 대고 키우는 논 미나리는 성장이 빨라 긴 대신 속이 비어 있죠.
아, 논미나리에 거머리나 세균 걱정 하시는데, 요즘 미나리 정말 깨끗하게 잘 길러 출하합니다.
깨끗하게 씻어 드세요!
봄미나리/가을미나리

미나리는 수확 시기에 따라 가을 미나리와 봄 미나리로 나뉩니다.
가을 미나리는 10월 말경부터 1월 초에, 봄 미나리는 2월부터 4월에 수확되는데요.
가을 미나리는 50일 정도 재배하고, 봄미나리는 재배 기간이 조금 더 짧아요.
재배 기간이 다른 만큼, 두 미나리의 맛과 향이 각각 다릅니다.
보통 봄 미나리가 가장 맛있다고 알고 있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오해가 있는 얘기입니다.
가을 미나리 특유의 향과 식감이 있거든요.
진한 향과 연한 식감을 원하면 가을 미나리를,
아삭한 식감과 특유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봄 미나리를 권해 드려요.
가을 미나리는 비닐하우스에 온도를 높여서 키웁니다.
능동미나리처럼 연중 미나리를 맛볼 수 있는 이유는 재배 기술이 그만큼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가을 미나리는 잎이 거의 없이 줄기만 나올 때가 있는데,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장바구니에 넣어주세요.
미나리의 향은 줄기에서 나오거든요.
능동미나리에서 줄기를 쫑쫑 썰어 곰탕에 깔아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26억! 억소리 나는 미나리의 로컬씬은
한재미나리/의령미나리/육동미나리 …?
위 이름들은 모두 미나리의 지역적인 구분입니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한재 미나리에 대해 먼저 알아볼까요?
경북 청도군 청도읍 한재골의 한재 미나리는 지리적표시제 인증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아, 그럼 청도 미나리는 또 뭐냐고요?
주소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재 미나리의 풀네임이 ‘청도한재미나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재미나리는 2월부터 시작해 5월까지 제철입니다.
초봄 이맘때부터 본격적으로 수확하는데 3월 중순이 되면 뿌리 색이 붉게 오르면서 제대로 된 향을 냅니다.
뭘 모르는 분들은 4월이 되면 미나리가 질기지 않을까 걱정하시는데요.
한재미나리는 딱 첫물 미나리만 수확해 나갑니다. 하우스마다 조금씩 수확 시기를 조정해 재배하고 있죠.
논미나리는 수확 때까지 계속 물에 담가 키우지만, 한재 미나리는 물을 넣었다 빼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한재 미나리 특유의 식감은 여기서 나옵니다.
논미나리와 밭미나리의 장점을 합쳐 성장은 빠르고 속이 꽉 찬 미나리를 생산하죠.
2013년에 한재미나리는 126억 매출을 기록합니다.
미나리가 고소득 작물로 알려지면서, 경남을 중심으로 미나리 재배가 성행하죠.
밭미나리를 생산하는 의령미나리, 체험을 겸해 마을 단위로 생산하는 경산의 육동미나리 등 지역명을 붙여 미나리를 브랜딩하기도 합니다.
미나리의 로컬씬에서 영화 <미나리>의 아메리칸드림과 닮은 구석을 찾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나리, F&B 씬의 주연급 데뷔
한인 인민사의 잔잔한 희망을 안겨준 영화 <미나리>부터, 19금 영화에서 15세 이용가로 미나리를 리메이크한 능동미나리, 로맨틱코미디계의 신예 미나리 야쿠르트, 그리고 로컬씬까지 미나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야말로 미나리의 주연급 데뷔입니다.
사람들이 미나리에 열광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찾은 마지막 이유는 바로 통제할 수 없는 불안과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 나라 안팍의 스트레스 상황입니다.
미나리를 비롯한 식물의 향은 실은 식물이 자라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강해집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미나리같은 향나는 채소를 찾게 되는 것은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자연스런 움직임이 아닐까요?
미나리는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우리를 희망으로 건너가게 해 줄 거예요.
각자가 주연이 되는 그린 카펫, 미나리를 듬뿍 올려 드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