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세계 최초 3D 프린팅 펜 ‘3두들러’가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허공에 대고 그리자 펜촉을 통해 나온 액체 플라스틱이 굳으며 금세 물체로 형상화됐다. 미드저니가 뚝딱 만들어내는 그림만큼이나 경이롭고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3D 프린팅은 수많은 예술 작품에 활용됨은 물론, 건축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며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두 자녀를 둔 A 씨 부부는 서울 근교로 이사할 새 집을 직접 설계해 짓기로 결정했다. 3D 프린팅 주택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둘러보며 태양광 패널을 갖춘 집을 선택한 뒤 색상, 구조, 인테리어를 가족의 취향에 맞게 수정했다. 이후 지역 건축 센터에서 모바일 3D 프린터를 예약했고, 일주일 후 예약된 날짜에 프린터가 집터로 도착했다. 이사와 설계까지 고민은 길었지만, 집을 완성하기까지는 7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3일 후 스마트 홈 기능까지 갖춘 주택이 완공되었고, 재활용 콘크리트와 나노 소재를 사용해 자연 친화적인 집을 완성했다. 3D 프린팅 기술로 A 씨 가족만의 ‘Home Sweet Home’이 탄생한 것이다.
3D 프린팅 건축이 주목받는 이유
3D 프린팅은 디지털 설계 파일을 적층 제조Addictive Manufacturing 방식을 통해 물체를 한 층씩 쌓아 제작하는 기술이다. 약 10년 전 미국 국정 연설에서 제조업 부활의 기술로 지목받으며 전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그 관심에는 3D 프린터로 만든 총에 대한 규제와 논쟁도 포함된다. 모든 기술의 발전에는 사이클이 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AI도 1956년 다트머스 회의를 통해 하나의 학문으로 탄생한 후 두 차례의 침체기를 거쳤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3D 프린팅 역시 기술이나 혁신의 채택과 발전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가트너 하이프 사이클Gartner Hype Cycle로 본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로 인해 관심이 시들해지는 ‘환멸의 단계Trough of Disillusionment’를 지나 이제야 기술의 수익 모델을 보여주는 ‘계몽의 단계Slope of Enlightenment’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단계는 다양한 영역에서 해당 기술을 활용하며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가는 시기다. 건축 분야에서 3D 프린팅을 활용하는 것도 그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건축 분야에서 3D 프린팅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건축은 계획, 설계, 시공, 완공 및 유지 관리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각 단계별로 전문가에 대한 의존도가 크고, 건축자재의 낭비가 발생한다. 또 기존 건축의 디자인은 복잡한 패턴을 구현하는 데 기술적 제약이 있다. 건축 분야에서 3D 프린팅을 접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계 과정에서 시뮬레이션과 모형을 통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시공 과정에서 인력에 대한 의존으로 생기는 비효율성을 줄일 수 있으며, 자재 낭비를 최소화하고, 곡면과 비정형 구조 같은 복잡한 건축물을 구현할 수 있다.
미학적 건물부터 우주 시설까지
미국의 SQ4D사는 자체 개발한 ‘ARCS’ 3D 프린터로 콘크리트를 쌓아 올려 주택을 제작할 수 있는 미국 최초의 3D 프린팅 주택 판매 회사다. 뉴욕주에서 판매된 SQ4D사의 주택은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3D 프린팅 주택으로 기록되고 있다. SQ4D사가 내세우는 3D 프린팅 주택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건축 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다. 일반 주택은 수개월의 건축 시간이 소요되지만, 3D 프린팅 주택의 소요 시간은 수십 시간에 불과하다. 물론 단축된 시간만큼 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방 3개와 욕실 2개로 구성된 단층 주택을 짓는 데 30만 달러약 4억 4,000만 원와 48시간의 프린팅 시간이 소요되었다.
둘째, 구조 강도Structural Strength다. 3D 프린팅 주택은 한 층씩 쌓아 만들지만, 3D 프린팅 방식의 특성 덕분에 일반 건축 방식보다 2배 이상 튼튼하다.
셋째, 안전성이다. 대부분의 건축이 3D 프린터에 의해 자동화되기 때문에 일반 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로자의 낙상이나 건축물 붕괴로 인한 안전사고 위험이 없다.
마지막은 환경친화성이다. 3D 프린팅 건축 방식은 필요한 만큼만 조형을 쌓아 올리기 때문에 재료를 깎거나 자르는 일반 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재 낭비가 없다. 이에 따라 환경 폐기물 처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을 기반으로 SQ4D사는 주택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상업용 건물 분야로도 3D 프린팅 건축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유럽에서도 3D 프린팅 건축 사례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시와 페리 3D 컨스트럭션PERI 3D Construction사는 ‘웨이브 하우스Wave House’로 일컫는 3D 프린팅 데이터 센터를 개관하며 건축 업계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웨이브 하우스는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웨이브 형태의 벽을 구현함으로써 독특하고 미적인 외관을 선보였다. 이 건물은 길이 54m, 너비 11m, 높이 9m로 설계되었으며, 3D 프린터로 시간당 4m2의 속도로 프린팅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벽면 건축은 단 140시간 만에 완성되었다. 웨이브 하우스는 3D 프린팅 기술이 미적 가치와 기능성을 동시에 제공하며, 데이터 센터 같은 특수 건축 분야에도 효율적이면서 혁신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에서 인간 정착을 위한 실험에 3D 프린팅 기술을 사용했다. 화성의 극한 환경에서도 승무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마스 듄 알파Mars Dune Alpha’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미국 항공우주국은 3D 프린팅 전문 기업 ICON의 시스템을 이용해 약 48평 규모의 구조물을 존슨 우주 센터 내에 제작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 중 하나는 화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레골리스Regolith라는 소재를 3D 프린팅에 활용한 것이다. 지구의 건축자재를 화성으로 운반하는 것은 비용과 기술적 측면에서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화성에서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해 미래 우주 거주지 개발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이처럼 3D 프린팅 건축은 주거 및 상업 시설은 물론, 우주 개발에도 적용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DIY 건축 시대 도래할까?
3D 프린팅 건축은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콘셉트 단계를 지나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고 있다’는 프로덕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건축에서 3D 프린팅 기술 활용의 의미는 ‘자동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전통적 건축 방식에서는 전문가를 포함해 여러 노동자가 투입되어야 구조물을 만들 수 있지만, 3D 프린팅 건축은 많은 부분을 자동화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AI를 폭넓게 활용하며 단순한 일을 하는 노동자가 AI로 대체되는 일이 건축 분야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건설사들은 3D 프린팅 기술에 투자하거나 관련 기업과 협업을 늘리고 있다. 프랑스의 생고뱅Saint-Gobain은 엑스트리이XtreeE라는 3D 콘크리트 프린팅 회사의 지분을 인수했고, 스위스의 홀심 그룹Holcim Group은 3D 프린팅 소재에 대한 연구 개발에 투자했으며, 스웨덴의 스칸스카Skanska는 러프버러Loughborough 대학교와 3D 프린팅 건물 및 구조에 대한 연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현대건설, 삼성엔지니어링, HN 등의 기업이 3D 프린팅 건축에 관심을 갖고 시장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3D 프린팅 기술의 최종 지향점은 ‘생산’이다. 3D 프린터가 무엇이든 만들어냄으로써 제조업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다양성과 프린팅 속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모든 기술이 그러하듯 3D 프린팅도 침체와 발전을 거듭하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을 ‘1인 제조업체’로 만들 것이다. 건축에서도 3D 프린팅 소재가 다양해지고 프린터의 적층 속도가 빨라진다면 누구나 원하는 대로 자신의 집을 설계하고 지을 수 있는 날도 좀 더 빨리 오지 않을까.
글. 천백민(상명대학교 지능데이터융합학부 스마트생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