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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경험하는 최적의 방법, 보법부터 다른 플라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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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도시를 ‘이동’의 공간으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플라뇌르’는 다르다. 목적 없이 걷고, 멈추고, 바라본다. 도시의 소리와 색, 움직임을 감각하며 거리 그 자체를 예술처럼 경험하는 존재. 지금 이 순간, 당신도 도시를 다시 느끼는 걷기를 시작할 수 있다. 목적 없는 걸음 속에서 낯선 자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플라뇌르Flâneur’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길거리 신사의 유모차’ 혹은 ‘도심을 거니는 한량’ 정도를 뜻하지만, 사실 다른 언어로는 똑 떨어지게 번역하기 어렵다. 플라뇌르는 단순히 거리를 걷는 행위가 아니라, 산책 그 자체를 철학적 태도로 끌어올린 개념이기 때문이다. 의역하자면 ‘거리를 유유히 배회하며 도시의 흐름과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산책자’ 혹은 ‘도시의 무심한 관찰자’에 가깝다.

 

 

도시를 이해하는 느린 방법

 

플라뇌르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도시의 시각적 풍요로움을 세밀하게 즐기는 데는 골목만 한 공간이 없다. 골목에는 넓고 반듯하게 정돈한 대로변에는 없는 독특한 질감과 감성이 가득하다. 핵심은 바로 불규칙성이다. 골목에는 건물과 담벼락, 발코니의 선이 일정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창문이나 문짝은 제각각 다르며, 벽의 마감재와 색상도 통일돼 있지 않다.

 

그 조화롭지 않은 불균형이 오히려 살아 있는 도시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좁고 들쑥날쑥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작은 광장이 나타나기도 하고, 계단 몇 단과 완만한 경사지가 시선을 붙들기도 한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그 위에 걸린 옷가지들은 마치 풍경 속 색채처럼 공간을 수놓는다. 골목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끊임없이 변주되는 도시의 리듬이 펼쳐지는 장소이자 미적 관능주의를 실현하기에 최적의 무대다.

 

 


도시를 산책하며 관찰하는 플라뇌르의 시각에서 파리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한 에드먼드 화이트Edmund White의 <게으른 산책자The Flâneur> ©MYUNGHEE KWON

 

 

‘도시를 보는 최고의 방식’으로 통하는 플라뇌르는 조깅이나 쇼핑처럼 목적 있는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걷는 것, 산보散步라는 단어 그대로 흐트러진 걸음으로 도시의 숨결을 느끼는 행위다. 일상의 목적성과 효율성에서 벗어나 도시의 미로를 탐험하는 경험이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아마추어로서 눈에 보이는 것과 몸으로 느껴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처음에는 표면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도시의 구조 너머에 숨겨진 내면성과 정서, 장소의 서사가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찰자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무심히 개입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바라보는 태도. 플라뇌르는 도시와 삶의 다양성을 탐색하는 동시에, 그 다양성에 예의를 갖춘 거리 두기로 응답하는 행위다.

 

 

 

작은 것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

 

플라뇌르의 매력은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특별히 장대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한 것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다채로운 풍경이 있다. 인생의 많은 순간이 그러하듯, 때때로 작은 것이 큰 성취보다 더 깊은 기쁨과 만족을 안겨준다. 가령 골목을 걷다가 문득 빵 굽는 냄새를 맡거나, 우연히 아기자기한 상점의 입구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다. 예상치 못한 기쁨, 그 짧지만 따뜻한 정서는 종종 목적 없는 걸음이 작은 가게나 커피하우스를 향하게 만든다. 그 휴식마저도 플라뇌르의 일부다. 언제, 어디서든 잠시 멈춰 쉬었다 가는 것. 인생이라는 여정 자체를 닮은 행위다. 분명한 건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대로변의 스타벅스나 샤넬 매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플라뇌르는 큰 시간이나 비용 없이도 누릴 수 있는 지적 유희이자 감각의 예술이다. 원래는 어떤 도시적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던 말이, 이제는 하나의 삶의 태도,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단지 도시를 걷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호흡하는 방법이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우리는 일상의 소음과 번잡함으로부터 멀어지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안에는 시대를 초월한 감성의 가치가 깃들어 있다.

 

 

 

저녁 산책의 미학, 파세자타

 

플라뇌르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탈리아의 ‘파세자타Passeggiata’가 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가족, 친구들과 저녁 시간에 동네를 걷는 관습이다. ‘걷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파세자레Passeggiare, 길을 의미하는 영어 패시지Passage와 어원이 같다.

 

평일에는 오후 5시쯤 시작해 8시까지, 일요일에는 미사를 마친 오후에 한두 시간 이어진다. 해가 긴 여름날이면 시간이 좀 더 늘어난다. 달콤한 시에스타Sièsta 이후, 가장 기분 좋은 상태에서 시작되는 저녁 식사 전 산책이다. 사람들은 골목길을 거닐다가 ‘일 코르소Il Córso’라 불리는 주도로나 광장에 모인다. 해안 도시의 경우 바닷가 산책로가 광장 역할을 한다. 평소에 늘 걷던 길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특별하다. 걸음의 질도 다르다. 이 걸음은 서두를 이유가 없고, 목적지도 없다. 그래서 부드럽고 천천히 걷는 것이 핵심이다.

 

파세자타의 본질은 ‘멋진 장면을 연출하는 것’, 즉 걷는 풍경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 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로 보고, 보이는 것이며, 하이라이트는 단연 패션이다. ‘좋은 인상을 남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표현 ‘파레 라 벨라 피구라Fare la Bèlla Figura’처럼 멋지게 꾸미는 것이 필수다. 단, 과하지 않다. 유명 브랜드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파세자타는 최신 패션을 자랑하고 관찰하는 자리이자 새 애인, 새 아기, 새 옷을 소개하는 무대다. 그래서 유모차에 탄 아기조차 예쁘게 차려입힌다. 작은 마을에서는 같은 길을 따라 동네를 두세 바퀴 반복해 걷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도중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기도 한다. 패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다. 이탈리아 수백 개 마을의 골목은 매일 저녁 패션쇼의 런웨이가 된다.

 

유럽의 귀족 문화를 동경하던 미국 남부에도 유사한 풍습이 있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주인공이 출산 후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동네를 돌며 주민들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도쿄에는 ‘긴부라銀ブラ’라는 문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커피가 귀하던 시절, 일본의 부유층이 긴자에서 커피를 마시고 뒷골목을 산책하던 관습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말 그대로 긴자銀座를 ‘부라부라’ 느긋하게 거니는 것을 뜻하며, 오늘날에는 긴자 뒷골목을 천천히 산책하고 구경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1 이탈리아의 파세자타. 저녁 시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동네를 걷는 관습이다. ©박진배

2 도쿄의 긴부라 문화는 긴자 뒷골목을 천천히 산책하고 구경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박진배

 

 

 

레종 데트르를 만나는 길

 

이처럼 플라뇌르는 도시를 경험하는 최적의 방법이다. 평소에 늘 걷던 길이지만, 이때는 특별하다. 목적이나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 자체’를 위한 걸음이다. 마치 석양을 바라보거나, 에드가르 드가의 그림을 감상하거나 장미 향기를 맡는 것과 같다. 그 시간 속에서 문득 ‘존재의 이유, 레종 데트르Raison d’Être’가 떠올랐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오늘날 ‘플라뇌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빠르게 흐르는 도시의 시간과 정보의 속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능적으로 소비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압박에 놓여 있다. 그럴수록 플라뇌르의 태도는 삶의 리듬을 되찾고, 사유의 여백을 회복하는 하나의 실천적 철학으로 되새겨진다. 거리를 걷되 목적 없이, 세상을 바라보되 비판 없이, 하지만 깊은 감각으로. 플라뇌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천천히 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는다.

 

 

 

글. 박진배(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 대학교 명예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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