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많은 직장인은
그 자존감을 고이 접어 집에 두고 나온다
직장인이 집을 나설 땐, 사뭇 진지하다.
굳이 장수가 아닌 졸개라 할지라도, 전장에 나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렇다. 밖은 지옥이라지만, 직장 안은 전쟁터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회사는 물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어쩌다 모인 사람들의 만남은, 그렇게 비장하다.
사회적 가면을 여러 겹 쓰고 있지만, 어쩐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과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내 얼굴에 맞지 않는 가면, 잘 맞지 않는 역할이 우리의 감정을 강타한다. 특히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받게 되는 지적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망신은 감정을 넘어 영혼까지 시퍼렇게 물들이고 만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파묻혀 일이 나인지 내가 일인지 모르는 생활을 하다 보면 정체성마저 흔들린다. 월급에 의지해야 하는 자신이 콩알만큼 쪼그라드는 순간이다.
어쩌면 그게 두려워 아침이 그리 비장한 것이다. 자존감을 고이 접어 두고 집을 나서는 이유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고이 접어야 하는 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그 둘의 차이가 거기서 거기일 것 같은 두 단어를 두고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다.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나, 지금까지 우리는 그것을 혼용하며 사용해왔다. 나부터 그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둘을 분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존을 위해서였다. 그 둘을 분리하지 않고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선 사전적 의미를 파악하고 가야 한다.
자존심 (自尊心)
1.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
2. 어떤 집단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는 데 사표 또는 선도가 될 만한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자존감 (自尊感)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혹시, 그 차이가 보이는지.
내가 발견한 차이는 바로 '남'이란 단어와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직장 생활로 힘이 들 때면 각오하고 또 각오했다. 누군가 상처 주는 말을 해도, 상사에게 억울하게 대판 깨져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더라도 절대 내 감정을 다치게 하지 말자고. 그리고 떨쳐버리자고.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퇴근과 함께 훌훌 털어버리자고 했던 무수한 상처와 감정의 소용돌이는, 잠자리에 들 때 입는 잠옷에도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그것들은 잠을 오지게도 설치게 했다. '자존감'은 하루하루 작아져만 갔다. 이러다가 나 자신마저 땅속으로 꺼져 사라질 것 같았다. 두렵고 또 두려웠다.
하지만 그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하고 그때를 바라보니 나는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을 상한 거였다. '자존심'은 '남'과 연관되어 있다. '남'에게 굽히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그래서 나 자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다. '자존감'은 설명마저 간단하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누군가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의 절대적인 신념이다. 잠깐 아래 그림을 살펴보자.
'자존심'과 '자존감'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by 스테르담
먼저, '자존감'이 '자존심'보다 큰 개념이다. 그리고 모양을 보면 '자존감'은 원을 그리지만, '자존심'은 모가 났다. '자존심'은 '타인'과 관계되어 있다. 누군가와의, 또는 어떤 상황에 따라 기복하는 마음(감정)이다. 하지만 '자존감'의 방향은 '나'를 향해있다. 누군가와 비교를 하거나, 상황에 관계없이 '내가 나를 존중'하면 되는 것이다.
'자존심'은 모가 나서 찌르면 아프다. '자존심'을 많이 상하면 '자존감'이 흔들리는 이유다. 반대로, '자존감'이 커지면 '자존심'과 겹쳐 찔리는 부분이 줄어든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둘 다 마음에서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혼동한다.
'자존심'이 상하면 내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느낌. 그것은 곧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다. '자존감'의 기반을 다져야 할 때다. 직장에선 사람들이 서로 살기 위해 그토록 공격적이고 방어적이다. 혹시라도 '자존심'상하는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한다. '자존심'상하면 존재가 망가질 거란 걱정이다. '자존감'이 잘 형성되어 있다면 '자존심'상하는 일이 일어나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다.
A: 어휴, 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지? 이건 다 누구 때문이야! 난 억울해! 못 받아들여! 운이 없었어!
자존심 상해!, 사람들이 날 뭐라고 생각했겠어?
B: 아, 실수를 하고야 말았네. 그래, 내가 평소에 챙기지 않은 탓이지.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다음엔 더 조심하자!
자존심은 상하지만, 내가 벌인 일이니 받아들여야지.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존감'이 잘 형성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 위에 보이는 그림과 같이 그 방향성이 반대다. 사람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떨쳐버릴' 수 있다. 심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주로 상황이나 자신을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이상 행동이 나타나고,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성격이 형성된다.
'자존심'이 상할 땐,
'자존감'으로 극복해야 한다
아직도 그 차이가 불분명하다면, '자존심'이 상할 땐, '자존감'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좋다. '자존감'이 잘 형성되어 있다면, 아무리 '자존심' 많이 상하는 일을 맞이하더라도 그 충격이 덜 할 것이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상처도 덜 받는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직장에서 있었던 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횟수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잘 형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 정신의학과 원장은 '자존감'의 3대 기본 축을 설명했다. '자기 효능감', '자기 조절감', '자기 안전감'이 그것이다. 모두 '자기'란 단어가 들어간다. '자기 효능감'은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을, '자기 조절감'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본능을 의미한다. '자기 안전감'은 자존감의 바탕으로 스스로를 편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이 세 가지 축에서 내가 느끼는 부족함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부분을 간과하고 살아왔는지 생각해보자.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정체성'에 대한 방황을 많이 했다. 살아가면서 맞이했던 실패와 좌절은 모두 내가 못나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렇지 뭐...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겠어?'란 부정적 신념이 온 세포를 감싸 안았었다. 그래서 난 심리학을 공부하고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들여다보니 분명 나도 '자존감'이 있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어쩐지 그것은 꿈틀거렸다. 전기 자극을 받은 어떤 생명체와 같이. 그리고 직장에서 겪는 거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어쩌다 '인정'을 받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여 싹을 틔웠다.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하고 나니, 하나 둘 틔운 싹은 어느새 풍성해져 어렵고 힘든 직장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풍요로운 숲이 된 것이다.
집에 접어두고 나와야 할 건,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자존감'이 항상 건강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 형성해 놓았다고 마냥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직장에서 부대끼며 맞이하는 여러 형태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상황들. 그것에 반응하는 자신을 관찰해야 한다.
'자존감'이 잘 형성되었다고 해서 직장 생활이 순탄할리는 없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것과 관계없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잠시 함께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의 조합엔 자비가 없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다고 남을 짓밟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다간 자신도 다친다. 살아남되,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아가야 한다. 목적은 남을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서는 것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은 그래서 필요하다. 나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남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니, 아침에 직장으로 나설 때 굳이 무언가를 고이 접어 집에 두고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존심'이어야 한다.